[오마이뉴스 노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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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한길사 |
공자는 무녀의 사생아 출신이었다? 다소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이런 주장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도올 김용옥의 논어 강의에서였다. 나는 김용옥의 논어 강의를 직접 시청하지는 않았지만, 도올의 논어 강의에 대한 인터넷 글을 통해 이런 학설을 처음 알게 됐다.
그 글에서 도올은 일본의 어느 학자가 쓴 <공자전(孔子傳)>이라는 책을 인용했다고 했다. 그 일본 학자는 한학자로 이름 높은
시라카와 시즈카이며, <공자전(孔子傳)>의 우리말 번역본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이다.
유교사상, 유교문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과거 역사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어떤 사람은 '조선이란 사회는 유래 없는 유교적인 지식기반의 사회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유교 문화를 '전통'이라는 빛나는 이름표를 달아주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흔히들 유교의 태산북두로 여기는 공자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았을까.
"체제의 이론이 된 유교도 출발점에서는 역시 반(反)체제 이론이었다. 공자의 행동이 이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반체제 이론은 그것이 목적한 사회가 실현되면, 곧바로 체제 이론으로 전환한다. 이것이 변증법적 운동이라 불리는 것이다. 유교적 사유에 아직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이윽고 다시 새로운 반체제 이론을 낳을지도 모른다." (28쪽)
저자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공자와 유교의 사상이 본래는 반체제적이었으며 공자의 전기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공자의 말들이 기록된 <논어>나 사마천의 <사기>조차도 공자의 삶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엄정한 원전 비평을 한다. 이 책은 공자와 그의 시대, 그리고 공자 주변의
인물과 사상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지식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사기>에는 공자가
노자에게 묻고 노자가 답하는 장면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여러 정황을 따져볼 때, 노자가 공자보다 후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또한 장자는 유교의 반대되는 사상을 펼친 사람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오히려 맹자보다 공자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고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장자의 사상은 유교의 깊은 곳까지 내러가서 산책하고 나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공자의 출신성분은 무축(巫祝)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시라카와 시즈카는 추측하고 있다. 그는 치밀한 고문헌의 비교와 고대 중국사회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공자의 계보를 작성한다.
"공자는 무녀의 자식이었다.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사생아였다. 이산에 빌어서 태어났다는 것도 예삿일은 아닌 듯하다. 마치 예수처럼 신은 즐겨 그런 자식을 선택한다. 공자는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의 전반생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신은 자신을 맡긴이에게 깊은 고통과 고뇌를 줌으로써 그러한 진실을 자각시키려한다. 그것을 마침내 자각해내는 이가 성자가 되는 것이다." (74쪽)
물론 공자의 출생의 비밀(?) 캐기는 공자 개인의 사적인 삶을 그려내는 데에서만 머물지는 않는다. 저자는 초기의 유가 집단의 성격도 무축 집단과 연결짓는다. '유(儒)'라는 글자가 고대 중국사회에서 가뭄 때에 불에 태워지는 무축과 관련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례(喪禮)를 특히 강조하는 유교의 전통과 <장자>에서 2인조 도굴꾼으로 희화적으로 묘사된 대유(大儒)와 소유(小儒)라는 인물을 통해서 유교의 원류는 장례와 관련된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말은 곧, 공자와 공자를 따르던 유가 집단들이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는 '내가 젊었을 적에 미천하여 천한 일에 매우 능했다. 군자는 재주가 많아야 하는가? 많을 필요가 없다'(<논어> '자한')고 탄식하는 듯한 말을 내뱉고 있다. 공자의 전반생은 어둡고 험난했음이 틀림없다." (37∼38쪽)
공자는 비천한 무축 집단 출신이었지만, 박학했으며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드높은 이상은 혼란한 현실의 벽 앞에서 결코 실현되지는 못했다. 공자는 이상을 펼치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녔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양호와 경쟁적 대립자로서 자리매김한 공자는 양호가 망명한 뒤에야 당연히 노나라의 조야로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어느 정도 뜻을 이루었던 시기는 채 3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공자는 어째서 실패했던 것일까. 그것은 공자가 혁명자(革命者)이기는 했지만 혁명가(革命家)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자에게는 양호와 같은 정치 수완이 없었던 것이다." (51∼52쪽)
평생의 라이벌이기도 한 양호에 비해서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공자는 그 때문에 오히려 제자들과 인(仁)에 대해서 논할 수 있었고 인류의 성인으로 받들어지게 된다.
이 책은 작게는 공자라는 인물의 역사적인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그에서 그치지 않고 고대 중국의 가장 혼란한 시기의 한 불평분자이며 이상주의자의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그런 패배한 스승과 함께 하려는 제자들의 높은 배움의 뜻을, 그 스승과 제자들을 또 다시 넘어서려는 중국의 숱한 사상가들의 정신적 싸움과 모험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이 세상이 바뀔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크고 작은 정신의 지렛대들은 끝없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자라나 부러지고 또 부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