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 악의 역사 2, 초기 기독교의 전통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11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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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나에서의 대량살상에 대해 사람들은 즉각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그 공포를 이성적으로 파악하여 반응했다. 비종교인들은 이를 두고 종교적 믿음의 결과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급진적 좌파의 결과물이라 하고, 급진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익의 인종차별이 그 희생자들을 절망으로 내몬 결과라고 했다. 이런 즉흥적인 설명에 대해 그린필드는, "그 밤의 공포스러움을 격감"시키는 일이고, "그 공포를 우리의 선입견으로 그리고 자기 본위로 꿰맞춤으로 인해 그 공포에 길들여져 익숙하게 만들어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 속에서 그런 공포는 "모든 개개인의 의식 속에 잠복하고 있는 검은 충동"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정글(검은 충동의 잠복처)은 우리로부터 겨우 한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개인의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나올수밖에 없는것 같습니다.-.쪽

신의 뜻과 길을 인간에게 정당화시키려는 이러한 종교들의 전통적인 노력을 우리는 신정론이라 한다. 신정론에서는 네 가지의 논리적 선택이 존재한다.

첫째, 신은 완전한 선도 아니고 전능하지도 않다(이런 전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이를 신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둘째, 신은 완전한 선이나 전능하지는 않다.
셋째, 신은 전능하나 완전한 선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신은 선 그 자체이며 또한 전능하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전통 속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된 마지막 정의는 악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병립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완벽한 결론은 여전히 우리를 비껴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즉, 우리가 신의 선함을 구하려면 그의 전능함을 버려야 하고, 또는 신의 전능함을 위해서는 그의 절대 사랑을 그 대가로 바쳐야 한다.

=>악을 부정하면 신 또한 부정하는것이다.-.쪽

신정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움 그 자체인 유일신을 상정하는 신학자들에게 항상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힘든 과제를 주고 있다. 즉, 만일 신이 전능하고 선 그 자체이면 왜 악마가 이 세상에 신과 함께 공존하도록 허락했는가?
이런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물질, 에너지, 그리고 정신을 포함한 온 세계는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출되었다.
豈?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셋째, 신은 전능하다(그는 논리적으로 창출될 수 있는 어떤 세계도 창조할 수 있다).
넷째, 신은 사랑 그 자체다(그는 창조 가능한 가장 완벽한 세계를 선택한다).
다섯째, 그러나 그 세계는 악마를 포함하고 있다.-.쪽

간단명료한 답은 없다. 신정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①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악은 가장 훌륭한 선을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하다.
②악마는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우주 창조의 필요악적인 산물이다.
③만일 우리가 악마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있다면, 악마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허상이다.
④우주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신은 이를 완전하게 그리고 있다.
⑤악마에 대한 모든 의문 제기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다.
⑥악마의 존재 의의는 미스터리인데, 신이 영원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도록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⑦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시험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한다.
⑧고통과 고난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⑨악은 오로지 죄의 결과물이고, 죄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실행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신은 악마의 존재를 허용하는데, 그것은 자유의 완전한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서다.
마지막 아홉 번째가 기독교 신정론의 가장 두드러진 논점이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강력한 반론을 제시한다.
①고통과 시련이 왜 이리 가혹한가? 칼이나 네이팜탄을 쓰지 않고 서로 뺨을 때리거나 발로 차는 것만으로 신이 계획한 자유의 실현은 충분치 않단 말인가?
②토네이도나 암과 같은 자연적인 악들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생겨난 죄의 결과란 말인가?
다른 관점에서의 논쟁도 있다. 우리가 만일 순수한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하는 신을 상정하여 논의한다면, 분명한 것은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쪽

프레더릭 손탁은 "신은 선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본성 속에 있는 악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선이 아니다. 그가 인간에게 불필요한 파괴가 가해지도록 방치한다는 점에서는"이라고 진술한다.

=>신도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뜨끔하실까요?-.쪽

신약성서는 유일신인 선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말씀인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나 또 다른 영적 권능, 즉 악을 하나님의 선과 그리고 어둠을 하나님의 밝음과 대결시키는 권능 또한 존재한다. 이 영(spirit)은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로 '적, 대항자'를 뜻하는 '디아볼로스(diabolos)', 히브리어로는 '방해자'를 뜻하는 '사탄',그리고 영어 어원으로는 '악마'다.-.쪽

그리스도 출생 이후 1세기 동안 그리스 철학 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사상들은 기독교와 그노시스 작가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데몬들(demons)을 신들과 인간 사이를 매개시켜주는 존재로 정의했다. 이런 데몬들은 유대-기독교 천사들과 매우 유사했다. 플라톤주의자들에게 데몬은 선과 악이 혼합된 존재이고, 혼합의 정도는 얼마나 비이성적인 면이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느냐에 달렸다. 호메로스의 사상과 초기 그리스 사상에서 다이몬과 테오스(theos)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았다. '신들'처럼 '데몬'도 신성한 섭리의 발현체로서, 그리고 그런 신성한 원리와 같이 선과 악의 혼합적 존재들이었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분명히 선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호 천사였다. 기독교 시대가 도래하자 '데몬'이라는 용어는 자주 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다이모니온(daimonion)'으로 대체되었고, 기독교도들은 다이모니아(damonia)를 악의 천사와 연결시켰다.-.쪽

2세기 중엽 기독교는 눈에 띄는 변화를 겪었다. 사도 교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신비적ㆍ직감적 사고 대신 계시를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반영하는 신학이 뒤를 잇기 시작했다. 저스틴과 이레나이우스 등과 같은 '변증론자들'은 기독교가 보편성을 주장하려면 랍비의 사상이나 그리스 철학과 지적으로 경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또한 기독교인은 로마 제국과 확고하게 자리잡은 로마의 이교도(물론 이 종교는 이미 깊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말이다)가 갖고 있는 반감에도 직면해야 했다. 기독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분열은 점점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신약성서의 규범화는 여전히 유동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세기에 견해의 급격한 차이가 발생했다. 여기서 승리한 집단은 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결국 정통―'옳은 사상'―이 되었고, 이 싸움에 참여했던 작가들에게는 '변증 교부'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교부들은 이단자라 불리게 되었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쪽

당시 교부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세력은 그노시스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서구 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종교운동의 하나다. 현대 학자들은 '그노시스주의'란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노시스주의는 기독교의 급진적인 헬레니즘화로부터 나온 기독교 이단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쿰란과 나그함마디 유적들이 발견된 이후에 학자들은 후기 그노시스파의 거의 모든 사상적 요소들은 이미 쿰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그노시스파는 일련의 사상들, 즉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그리스 철학(특히 중기 플라톤주의), 히브리 전통, 에세네파, 그리고 기독교에서 일반적 성향을 뽑아낸 사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반적 성향은 사상 논쟁 운동 속에서, 즉 처음에는 유대-기독 공동체에서, 그 다음은 그리스-기독 공동체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 그리고 유대-기독교 환경에서 그노시스 사상은 그노시스교도보다 더 이원론적인 사도 작가들의 사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약 150년 이후부터 그노시스주의는 더욱더 이원론적이고 신비적이고 한층 더 헬레니즘화했다. 이미 120년 또는 130년경에 기독교 작가들 중에는 벌써 그노시스파를 위험시하여 이를 이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쪽

악마는 그의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지 창조자가 아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악마의 창조주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 하나님은 악마를 선한 성품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천사를 창조했지만 이 천사가 스스로 자신을 악마로 만들었다.

(중략)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유의지를 불어넣어주었고, 이는 그들이 단순한 기계적 존재가 되는 대신 스스로 도덕적 선을 추구할 잠재력을 지닐 수 있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에 대한 잠재성은 똑같이 그 반대의 가능성도 수반했다. 하나님은 사탄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게 창조했고 영광도 주었지만, 사탄은 자신을 타락시키는 쪽을 택했고 그 자유선택을 악을 위해 써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최초로 죄를 지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와 악을 온 우주에 퍼뜨린 장본인은 바로 그였고, 그리하여 그는 '태초부터'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것이다.-.쪽

클레멘스는 결여(privation) 신학과 존재론으로 악을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기독교도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악은 본질적으로 진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없다. 플라톤적ㆍ그노시스적 유출론의 영향을 반영한 결여론은 기독교 악마론에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클레멘스는 하나님의 존재성으로 논의의 출발점을 삼았다. 하나님은 진실로 존재한다. 그의 존재는 완전하고 완벽하며 선 그 자체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다. 따라서 그 외의 다른 어떤 존재도 당연히 그보다 더 진실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했다. 하나님의 창조 동기는 단지 순수한 자비에서 비롯됐다. 비록 그 자신 자체가 완벽하여 필요한 어떤 것도 없었지만, 선을 나누고 싶었고 다른 존재에게도 확대하고 싶었다. 그는 홀로 존재했기에 다른 존재를 창조해야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당연히 불완전하다. 이 세계는 실재하지만 전적으로 실재하지는 않고, 선하나 완전히 선하지는 않다. 이 우주는 단지 진정한 실재의 어설프고 결핍된 반영일 뿐이다.-.쪽

모든 것이 똑같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형상들이 우주를 채우고 있고, 이러한 형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결핍되게 되었다. 이로써 존재의 고리 사슬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은 높은 곳에 있는 존재들보다 실재적인 면에서, 선적인 면에서, 영적인 면에서 뒤떨어진다. 즉, 그들은 실재성과 선함이 더욱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은 제일 높은 곳에 있고, 완벽한 존재이며, 선의 화신이며 영 그 자체다. 하나님 아래에는 천사들이 있고 이들은 다시 등급별로 나뉜다. 그중에서 대천사는 가장 실재적이고 가장 선하며 하나님에 가장 가깝다. 천사 다음에는 인간, 그 다음에는 동물, 식물, 돌 등이 순서대로 자리잡고 있다. 계속해서 내려가면 가장 근원적인 무형상의 물질에 다다르는데, 이것은 가장 비실재적이고 비선적이고 비영적이며, 거의 존재성을 상실한 가장 큰 악이다.-.쪽

락탄티우스는 이러한 이원성을 인식하면서, 왜 하나님은 특히 선과 악처럼 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을까라고 묻는다. "왜 진정한 신은 만물에서 악성을 제거하거나 삭제하는 대신 다 같이 존재하도록 했을까? 왜 그는 태초에 모든 것을 타락시키고 파괴한 마왕을 창조했을까?" "악의 원인과 원리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원래 그렇다'라는 게 그의 답이다. 첫째, 악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선은 악이 없이는, 악은 선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선을 악과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악을 선과 구별함으로써 우리는 선을 정의내릴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 필연성이다. 둘째, 악이 존재하는 것은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악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에 대립되는 덕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악의 존재를 원했다. 만일 하나님이 악이 없는 세상을 창조했다면, 선만이 있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이 의미 없는 그런 세상을 창조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악덕이 존재하지 않으면 또한 대립 개념인 미덕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고, 악덕의 유혹을 받지 않으면 덕을 쌓는다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구별짓고 선과 악 사이에 거리를 두어 우리가 악의 본성을 선의 본성과 대별하고 대립시키면서 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악을 배제하는 것은 곧 선을 제거하는 것이다."-.쪽

이러한 논증이 강력한 신정론을 이룬다. 그러나 이에 대립된 견해는 악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이 세상에서 악은 수적으로나 교활하고 잔학한 면으로나 우리의 자유의지에 필요한 그 이상을 훨씬 웃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락탄티우스의 논증은 이런 반대까지도 삼켜버린다. 왜냐하면 악은 단순히 존재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대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강력히 그리고 마땅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찮은 악만이 존재한다면 단지 그에 걸맞은 선이 존재하면 될 것이다. 만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악마의 힘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또한 무한하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이러한 대립 개념 속에서만 우리는 선의 본질을 파악하며, 주 하나님의 군대에서 악과 대항해야겠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쪽

자유와 결정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선택지들은 다음과 같다. ①우주는 무의미하고 임의적이며 어떤 계획이나 예측 가능한 방향성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입장은 현대 양자역학적 관점이다. ②우주는 결정적이다. 우주는 확정된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즉, 자연법칙은 일관적이고 설명 가능한―비록 대단히 복잡하지만―물질의 역학운동의 산물이다. 이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지지한다. ③우주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운명'이라든지 또는 마르크시즘에 등장하는 '역사' 등이다. ④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완전한 지도가 그려져 있다. ⑤지성적 존재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간 우주를 의지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④와 ⑤의 선택 사항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열려 있었다.
이 두 선택 사항의 구조 안에서도 자신의 시간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 첫 번째, 시간은 4차원이다. 비록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오직 시간의 한 면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은 영원 속에서 '변치 않는 4차원의 전체'로서 존재한다. 이런 전문적 설명은 아인슈타인이 했지만, 아래 깔린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일치한다. 두 번째,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주의 각 단계는 이미 확고히 결정돼 있어서, 만일 누군가 어떤 한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인들을 모두 알고 있다면, 그는 그 다음에 그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쪽

이 관점은 단지 첫 번째 것을 약간 변형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구조화된 결정론적 우주"에서 "그 우주는 원인들을…… 모두 내보이므로" 신은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지를 정확히" 알 것이다. 세 번째,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조건부적일 수 있다. 그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제외하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견해는 지성적 존재들의 자유와 양자역학 이론의 불확정성 모두를 허용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과 각 사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순전히 열린 구조의 세계"에 남겨두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정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선만을 행한다. 따라서 악은 그 외의 다른 존재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위대한 선을 위해 이 악행을 용납한다. 이 더 위대한 선은 우주에서 행해지는 자유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선의 확장을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 만일 그가 진정한 자유를 가진 존재들이 오직 선만을 선택하도록 그렇게 창조했다면 선의 확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의지는 필수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올바른 행위를 수행할 수가 없다. '자유의지론'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천사들과 인간들의 악에 대한 책임은 자유의지에 기인한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악에 대한 면책권을 주고 있다.-.쪽

신과 악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의 이해는 이렇다. 신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그런 절대선은 아니다. 그가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신은 이 악에 대한 책임이 있다.
둘째 단계는, 신은 악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에 대항하여 싸우기를 바란다. 그가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선 또한 존재한다. 그가 선을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악에 저항할 힘도 가지고 있다. 신이 이 힘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악에 저항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에게 행한 선은 완벽한 선으로서 인간의 선의 기준으로는 그 자체로 최상의 모범이 된다. 이것은 신의 선과 모순되지 않고 보완해준다. 이는 신의 선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신은 빛나는 다면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연관지울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인간세계에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신은 우리가 이해하지도 또는 실행하지도 못할 그런 형태의 선이 아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첫째 단계에서의 신의 '선'과 둘째 단계에서의 신의 '선'이 갖는 관계성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영원히 파악할 수가 없는 미스터리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선과 신의 선은 유사하며, 이 둘은 서로 갈라져 있지 않다. 더 나아가서, 이 두 단계는 반드시 함께 이해되어야만 한다. 첫 단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신론에 빠질 것이요, 둘째 단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이의 고난에 냉담하게 된다. 비록 신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는 우리가 이를 부정하고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쪽

결론적으로 악마는 다음과 같이 정의내릴 수 있다. 악마는 신이 아니다. 악마는 신의 권능을 제어하지 못한다. 악마는 하나의 피조물이다. 악마는 신에 의해 비로소 악마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악마는 우주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악마는 신과 우리의 적이며 혼신의 힘으로 물리쳐야 할 존재다. 악마가 존재론적 실재이든, 단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의 표상이든 상관없이 이러한 언명들은 사실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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