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안소민 기자]
가정을 전쟁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하면 편안함이나 안온함, 사랑, 포용과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가정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고도 소리 없는 전쟁터이다. 단, 그것은 서로의 사랑과 용서, 이해가 전제된 천사들의 전쟁이다. <샘터>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씨의 <가족>에 쓰여 있던 글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하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진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서로를 당연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사랑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게 가족이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이기에 빚어지는 많은 오해들. 이러한 갈등과 문제가 없는 가족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
스위트홈'이 아니라 진정 불행한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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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베란트가의 사람들> 겉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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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들녘 |
<후베란트 가 사람들(Houwelant)>은 가족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오해, 상처를 다룬 독일소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관계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들의 관계는 일견 무덤덤해서 감정의 굴곡이란 '그닥'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족 구성원 누구보다 더 섬세하고 미묘한 갈등과 오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그 아버지에서 아들로, 손자로 대물림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서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부자 3대와 가족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그들의 모습은 동양정서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자 억압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동서양이 비슷하다.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부자간의 갈등가족들에게 두려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채 스페인의 한 섬에서 부인과 단둘이 살아가는 요르게(1대), 오로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무능한 토마스(2대), 무능한 아버지를 경멸하면서 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티안(3대), 이들의 갈등과 미움, 용서와 화해가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작품은 요르게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 에스더(요르게의 부인)가 아들 토마스가 사는 독일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생일은 에스더와 그녀의 전 며느리였던 베아테만이 계획하는 것일 뿐 다른 가족들은 알지도 못하며 더구나 이 모임에서 가족들이 만나야만 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에스더는 토마스에게 생일날 아버지를 소개할 인사말을 쓸 것을 부탁한다. 토마스는 어렵사리 글을 쓰다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절망, 미움에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던 토마스는 아들 크리스티안에게 부탁하게 되고 크리스티안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요르게에 대한 토마스의 두려움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요르게는 꽤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그가 단순히 후베란트가의 가장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작품의 모든 갈등의 진원점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지나친 엄격함과 금욕주의, 자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순수의 결정체를 찾아내고자 했던 고집스러움은 가족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가족과 단절된 그의 모습은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가 직접 글을 쓴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와 직접 부딪히지 않고 전달하고 명령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그를 연결해주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어머니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했다.'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약하고 무능한 아들 토마스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는 가족들과 따로 지내면서 바다수영과 기도로 낙을 삼으며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혼혈아 소년에게 친부자간 이상의 애정을 느끼게 된다. 소년을 향한 애정은 그가 그의 가족에게 베풀지 못하고 또한 받지 못한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도망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그물일까?토마스는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두려움에 가까운 억압 때문에 자신의 아들 크리스티안만큼은 할아버지에게서 떼어놓으려 한다.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역시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의 무능함을 증오하게 된다. '아버지는 싫지 않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이 싫'은 크리스티안은 토마스와 포옹하는 것도 삼가고 아주 짧은 의사소통만 전화로 나누며 지낸다.
그러나 부자간의 이러한 오해와 갈등은 대를 이어가는 것일까? 크리스티안은 본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 리카르다로부터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을 듣는다.
'리카르다가 옳았다. 그는 가정을 꾸려나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아버지라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했다. 자신보다 못한 자식이라도 자식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인내심이 있어야했고 언제나 가장 빠른 길, 가장 짧은 길을 선택하는 대신에 우회로도 함께 가주어야 했다. 자식이 실패도, 희망 없는 상태도, 보잘것없는 진전도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운명이 또 한번 그에게 실패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를 맡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안해요. 아빠.' 그 역시 '아버지'가 되기엔 부족함이 많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이. 크리스티안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며, 후베란트 가족의 일원이라는 숙명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상태가 그 자신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어딘가 멀리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었고 깊숙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벗어나려고 기를 써야 하는 정글이고 늪이었다. 끊임없이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옭아매는 그물이었다. 그것은 후베란트였다.'인물들의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이 작품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세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에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 담겨있는 등장인물의 촘촘한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마음의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한 사람의 관점에서 쓰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등장인물 각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서술방식은 그 같은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대화보다도 독백위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유럽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인식론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한 몫 한 듯하다.
이 작품의 결말은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명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 분신처럼 사랑했던 소년이 죽고 나서 마음의 평정을 잃은 요르게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생일잔치를 위해 준비했던 인사말은 축하인사가 아닌 조사가 되어버린다. 글을 읽는 크리스티안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들은 상대방을 향해 높이 쌓았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 내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이제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속 시원하게 서로 오해를 풀고 용서하며 받아들이길 기대했던 독자들에겐 조금 미진한 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과 용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미완의 숙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네버엔딩스토리(never ending story)랄 수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볼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