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 <타잔> 겉그림.
ⓒ2006 실천문학사
김윤영의 두 번째 소설집 <타잔>에서는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보인다. 먼저 첫 번째 소설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의 여자가 있다. 그녀는 똑똑한 남편을 만나 남편의 뜻대로 토론토로 이민 왔다. 그녀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한다. 그러다 우연히 자동차 판매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이 꽤 호조를 보인다. 그녀가 그녀만의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에 남편은 고기만 먹으며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그녀에게 불만을 쏟아내기 일쑤며 예전의 그 똑똑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남았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것이다. 그는 다시 그녀를 데리고, 절대 이혼은 안 된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녀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준비를 한다. 그에게서 벗어나는, 다른 삶으로.

두 번째 소설 '얼굴 없는 소설'의 남자와 남자의 선배는 어떨까. 선배나 남자 모두 '한결 같은 사람'이다. 선배는 직장에서 어린 여사원에게도 존칭을 쓰고 점심 먹는 자리는 언제나 똑같으며 하는 일들도 똑같다. 남자도 비슷하다. 이러니저러니 삐딱한 척 하지만 선배 못지않게 한결 같은 사람일 뿐이다.

어느 날 선배가 사라진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형수는 신경질을 내다가 한숨을 쉰다. 남자는 우연히 형수의 가게에 들렀다가 그런 형수에게 위로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나온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남자와 형수는 자연스럽게 섹스를 한다. 선배를 좋아하는 남자지만, 남자도 특별히 다른 건 없다. 타인이란 본래 그렇듯, 일단 자신부터 생각하기 마련이다.

'세라'는 어떤가. 주인공 여자는 부양할 가족에 무능력한 애인 때문에 답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동남아로 여행을 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자유롭게 여행하러 다니는 세라를 알게 된다. 여자와 세라는 금방 친해지고 여자는 외모적으로 세라를 닮아가게, 혹은 흉내 내게 된다. 그때 그곳에 해일이 덮친다. 수영하던 여자와 세라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데 여자는 수영을 잘 한다. 세라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세라의 손을 놓고 혼자 도망친다. 사람들은 여자를 세라로 생각하고 위로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부터 여자는 세라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타잔>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얼굴이란 누구인가? 표제작 '타잔'이나 다른 작품들에서 만날 수 있는 그들은 흔히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이다. 정말 평범하다. 삶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하루 먹고 하루 살기도 바쁜, 배우자와 사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갈 곳 없어서 사는, 언제나 다른 삶을 동경하는 그들이다. <타잔>처럼 그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작품이 아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할 일이 없는 이들이다.

그럼 소설 속에 등장한 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다른 삶'을 꿈꾼다. 자신의 뜻대로 하자고 강요하는 남편이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는, 이력서 수백 통 써도 취직 시켜주지 않는 현실이 아닌 곳으로 훨훨 날아갈 꿈을 꾼다. 물론 그것은 '꿈'이다. 일장춘몽에도 비할 수 없는 허망한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이룰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욕구는 강렬하다. 어떻게든지 이루고 싶다. 그러자면 말도 안 되는 수단을 써야 한다. 첫 번째는 살인. 남편이든 부채업자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간에 죽이면 된다. 그들이 없으면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런 짓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일 수 없는 것은 어떤가? 이를 테면 사회의 시스템은? 이럴 때는 '분열'돼야 한다.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산책하는 남자'를 보자. 주인공은 아무도 써주지 않는다. 수백 통의 이력서가 종잇조각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주인공은 사회 시스템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미 그건 누가 시도했다가 다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포기해버린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하는가? 남자는 자신을 스스로 고용한다. 현실을 보는 눈을 막고 대신 자신만의 눈으로 모든 걸 판단해버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타잔>은 무미건조하다. 마치 희망이라고는 샅샅이 찾아봐야 쥐꼬리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포기한 소설 속의 그들의 얼굴과도 같다. 소설의 분위기는 무거운 회색빛깔로 비유할 수 있다. 아니면 황사가 뒤덮은 인간의 찡그린 얼굴과도 같다. 어떤 것을 붙이든, 그것이 '희망없음'으로 이어진다면 <타잔>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끝까지 저자가 이런 분위기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임에도 희망에 한 가닥 믿음을 걸어보겠다는 것인지 마지막 작품 '속삭임, 속삭임'에서 약하지만, 그래도 희망이라 부름직한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아픈 기억을 남기는 게 아니라 하얀 눈 위에 내 발자국을 꾹꾹 남겨보고" 싶다고 말하는 혼령의 말이 이것을 짐작케 한다.

그 혼령은 "그럼 여러분, 그때까지 모두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저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작품도 끝을 맺고, <타잔>도 끝을 맺는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긴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집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저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이나 분열 같은 비극적인 수단이 아닌 정상적인, 누구나 가능한 것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을?

<타잔>은 황사가 뒤덮은 인간의 찡그린 얼굴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이 끝맺음으로 인해 인간은 황사가 물러날 조짐을 발견하고 찡그린 얼굴을 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활짝 웃을 수 있을 것인가? 아직 그건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알 수 있다. 저 멀리서 햇볕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과는 벽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 비쳐지려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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