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일본 사이타마 현의 공립고등학교, 졸업식 행사에서 일장기를 게양하고 기미가요를 제창할 것을 지시한 교장의 조치에 반발한 학생들은 학생회 권리장전을 선포하고, 일제히 식장에서 퇴장했다. 일본의 이 학생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추상화된 민족의 권리를 거부하고 구체적인 개인의 권리를 택했다. 자율이 규율을 구축한 것이다.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비롯한 일본의 신보수 세력들은 학생들의 애국심이 땅에 떨어졌고, 그 책임은 자유주의적 학교 교육에 있다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만약 한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언론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자유주의사관연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종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는 한국 사회의 일반 여론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양자는 동일한 담론 구조를 갖고 있다.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코드화하는데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쪽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아니면 민중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일상적인 파시즘을 고사시키지 않는 한, 진정한 변역은 불가능하다.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싸움에 그친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수직적인 '지배'의 아비투스를 수평적인 '우애'의 아비투스로 대체하는것,그것이 혁명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의 객관적 구조와 아비투스(habitus)라는 내재화된 구조의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내면화된 성향의 체계로서, 인간 행동의 생산자이며 인지와 평가와 행동의 일반적 모습이다.
위의 아비투스는 '사회화된 주관성'으로 행위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도록 허락해주는 '행동의 연결원칙'이다. 여기서 다양한 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공간의 하위공간인 '장(champ)'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된다. 장이란 기존 행위자들간의 관계를 변형하거나 유지하려는 갈등이 일어나는 힘의 '상징적 투쟁' 공간이다. -.쪽
이러한 반공주의의 렌즈에서는 분홍색, 주황색, 빨간색의 구분이 없다. 모두 다 '빨갱이'인 것이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어기는 '좌'에 대한 정치적 공간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좌익' '좌경'은 '위장' '폭력' '불순' '혼란'의 담론과 동일시된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전혀 좌파나 공산주의와 관계없는 영역에서의 지배적 담론에 대한 도전도 반공ㆍ용공의 이분법에 걸려 들기 쉽다. 왜냐하면 반공주의처럼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자를 순식간에 완전히 수세에 몰아넣는 좋은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 수상한 데가 있어서……' '그 사람 사상이 좀 이상한 게……'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그 당사자는 아무런 근거 없이도 자신을 열심히 방어해야 하는 수세적 위치에 저절로 놓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대한 혐의가 풀려도 여전히 그를 의심하는 주변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물론 과거에는 이런 혐의를 받으면 상당한 물리적 폭압의 대상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당사자의 사상이나 행위가 '친북 용공' '좌경'이냐에 관계없이 이런 낙인 찍기의 효과는 발휘된다.
(중략)
「밝아오는 선진조국 자수하여 동참하자」, 「속은 인생 어제까지 밝은 생활 오늘부터」라는 구호는 그것을 읽는 주체인 '나'를 간첩으로 가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간첩이 분명히 아닌 우리도 그것을 읽는 순간 자신이 언제고 간첩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부담을 스스로도 모르는 새 갖게 된다.-.쪽
자유보다 규율과 복종을 훨씬 더 선호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의 위협'이라는 무서운 카드가 언제든지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병역 분야까지 비판과 토론에 개방시키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와 전두환의 파시스트적인 정권이 지탱해 오는 데 크게 기여한 군대가 과거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한다면, 시민 사회가 전체주의적 국가를 완전히 개혁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내무반에서 발로 차이고 주먹 세례를 당한다면, 이 나라가 자유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개인 인간성의 황폐화, 전체 사회의 폭력화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때리고 맞는' 의무 군대는 하루빨리 사라져야하지 않겠는가.
=>병역문제는 우리사회가 해결해야하는 문제중에 하나라고 봅니다.-.쪽
'외국인'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미국인에게 한국인은 외국인이며, 한국인에게 미국인은 외국인이다. '절대적'인 외국인이란 있을 수 없다. 외국인이란 그 나라의 '국민'을 전제로 타자화된 개념일 뿐이다. 이처럼 외국인이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서 상대화된 존재라면, 결국 '외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국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의 존재 방식이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국인의 존재 방식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쪽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 '국민'이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인의 삶과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의미 있는 변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단일 민족 사회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우리의 의식 근저에는 단일 민족=단일 문화=단일 국가로 등치된 도식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자연적 존재(혈통)인 민족이 인위적인 정치 공동체인 국가와 병렬되는 구도에서, 한국민의 정체성은 당연히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일시된다. 같은 혈통,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단일성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민족 의식이 한국민의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외국인의 존재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단일 민족 의식의 본질은 한 마디로 '우리'라는 동류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인들의 유별난 '우리'에 대한 애착, 최준식의 표현에 따르면 "유난히 우리를 밝히는 우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한국 문화의 특성으로서 지적된 바 있다. '나의 마누라'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라 불리며, 아는 사람에게는 인정스럽고 친절하지만 모르는 남에게는 냉담하다. 최재석은 이러한 한국인의 성향은 그 뿌리를 유교 윤리의 혈연 중심적 가족주의에 두고 있다고 파악한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우리' 의식의 기초는 가족주의라는 이름의 혈연적 집단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의(情誼)의 집단주의이며,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한다. '뗄래야 뗄 수 없는' 같은 핏줄을 나눈 사이에서 형성된 집단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혈통의 순수주의에 의하여 한층 더 강화된다. 예컨대 양자(養子)는 동족에서만 구해야 한다는 이성불양(異姓不養)의 원칙은 그러한 혈통 순수주의 한 예다.
파시즘이란 단어의 쓰임 속에서도 이러한 산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시즘의 원어인 파시스모(fascismo)는 고대 로마 근위병의 장식인 파쇼(fasc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무솔리니 체제의 사상적 근간인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혁명에 대항하는 무장 자본주의자들을 적대적으로 지시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그 쓰임이 범람하여 모든 권위주의적인 것이 이 말로 표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파시즘에는 전체주의로부터 반혁명적 반동 의지, 그리고 권위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이 집적되어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파시즘이란 말은 개인을 억압하고 배제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적대적으로 개념화하는 메타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파시즘을 얘기할 때 그 개념은 이러한 모든 흔적들이 입회함으로써 형성되는 의미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쪽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이란 상징 체계를 통해서 축조해 낸 질서적 세계로서 이를 흔히 노모스(nomos)라고도 부른다. 이 노모스가 상징 체계에 의해서 축조되는 것이라면 언어는 세계와 질서를 만드는 가장 주요한 도구가 된다. 파시즘 역시 전체주의를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세계라고 할 때, 언어의 구조와 그 사용 습관은 파시즘의 욕망을 형성시키는 대문자 타자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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