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박해현기자]
소설에는 유창한 언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소설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침묵의 여백을 배치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야기가 거기에 숨어있고, 독자의 의식을 섬광처럼 스쳐가는 이미지의 폭죽이 그곳에서 터진다. 오늘의 프랑스 문단에서 ‘언어의 마술사’로 통하는 여성 소설가 실비 제르맹(52·사진)의 글쓰기는 침묵의 숨결을 찾아가는 것이다. “글쓰기란 말들 사이에서, 말들 주변에서, 종종 말들의 한복판에서 침묵하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 듣는 법을 알기 위해
프롬프터(연극 무대 밑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 박스로 내려가는 것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실비 제르맹의 글쓰기는 이미지의 연쇄 작용을 통해 단어와 단어를 부싯돌처럼 부딪치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기호의 불씨를 집어든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어두운 접점에 숨어있을 또 하나의 세계를 우리의 의식 속으로 환히 불러낸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중략)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며 열리는 이 소설은 전통 소설이 요구하는 등장 인물들의 갈등과 사건의 연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의 환상 소설을 낳은 체코의
프라하 거리를 울면서 지나가는 한 여자만 나올 뿐이다. 1986~1992년 프라하에 머물렀던 작가의 체험 덕분에 거리 풍경 묘사가 상세하고, 중심 인물이 있지만, 이 소설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있어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다. 단지 발 뒤꿈치까지 내려오는 승복을 끌면서 황홍녘의 안개 속으로 울면서 걸어가는 거대한 여자의 궤적만 등장한다. 그 거인 여자의 동선을 따라가는 ‘나’의 의식이 소묘하는 환상적 풍경만이 전부다. ‘스스로 환영들을 지닌 채 도처에 환영들을 뿌리고 다니는 또 하나의 환영’인 그 여자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다리를 절뚝 거리며 오간다. 마치 ‘사라진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뒤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처럼. 이미지가 강렬한 한 편의 산문시와 같은 이 소설에서 거인 여자의 발걸음은 조용하지만 몸은 수런거리는 소리를 낸다.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그녀의 옷 주름들 속에서 떨리고 있고 잉크의 은근한 소곤거림이 그 속에서 가볍게 끓는다. 아니면 그건 눈물인가?’
이 소설을 번역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고려대)는 “이 거인 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눈물과 기억의 압축으로 만들어졌다”고 풀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내레이터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어떤 추억, 명상, 작품의 분위기, 혹은 고통의 편린들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의 마음도 심하게 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