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SUMMARY
●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는 하원의원이고 그의 어머니 역시 사교계의 명사라 그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 그는 수학과 라틴어를 싫어해 시험 도중에 기절하기도 했다. ● 19세 때 육군사관학교 샌드허스트에 들어갔다.-.쪽
30초 SUMMARY
● 1895년 그는 유명한 제4경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 어머니의 사교계 인맥 덕에 그는 폭넓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 ● 21세 때 전쟁에서의 경험을 기사로 써서 신문사로 보냈다. ● 오른쪽 어깨를 다쳐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했다. ● 여러 신문에 기고하는 기자로 활약했으며 《말라카드 전투부대 이야기》라는 첫 책을 펴냈다-.쪽
30초 SUMMARY
● 1900년 처칠은 카키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 1901년 2월 처칠은 하원에서 첫 연설을 했다. ● 보수당의 지도자들은 반대 입장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처칠을 싫어했다. ● 아버지의 전기 《랜돌프 처칠 경》으로 그는 돈과 명성을 얻다. ● 1906년 그는 보수당을 버리고 자유당에 입당했다.-.쪽
30초 SUMMARY
● 민주당원으로서 처칠은 진보적인 개혁론자였다. ● 하지만 그는 여성참정권에는 반대했다. ● 여러 복지정책을 강변한 그는 식민성 차관이 된다. ● 그는 보수당과 자유당 둘다로부터 소외된다. ● 1911년 처칠은 해군성 장관에 취임한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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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에서 처칠은 일대 개혁을 단행해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1912년 그는 육군을 본따 해군 전략 참모부를 만들었다. ●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영국 해군은 무적의 독일에 맞설 수 있었다. ● 처칠은 자유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벨파스트를 방문했다. ● 1914년 다르다넬스 작전의 비극적인 실패로 처칠은 비난을 받았다. ● 1915년 11월 그는 관직을 떠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쪽
30초 SUMMARY
● 보수당원들은 다시 국회로 돌아온 처칠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 로이드 조지 수상은 그를 군수장관에 임명한다. ● 군수장관이 된 그는 1917년 전차 제작을 지휘한다. ● 1921년 식민성 장관이 된 그는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을 안정시켰다. ● 세 번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1925년 그는 다시 보수당에 들어갔다. ● 1929년 보수당이 무너지고 노동당이 정권을 잡자 처칠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쪽
30초 SUMMARY
● 34세 때 그는 클레멘타인 호지어와 결혼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으나 대부분 자녀들은 불행하게 되었다. ● 그림을 배운 그는 평생 취미로 삼았으며 수많은 책의 작가로서 최고의 영광인 노벨상도 탔다.-.쪽
30초 SUMMARY
●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도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처칠은 비난했다. ● 인도 문제를 오판한 뒤로 처칠은 히틀러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무시당했다. ● 국왕 에드워드 8세의 퇴위에 반대한 그는 볼드윈 수상을 비롯한 모두에게 소외당했다. ● 새 수상이 된 체임벌린에 의해 그는 다시 국회로 돌아온다.-.쪽
30초 SUMMARY
● 24년 만에 해군으로 돌아온 그는 함대를 전시 체재로 전환시키고 독일의 공격에 맞섰다. ● 1940년 그는 신임총리로서 감동적인 첫 연설을 했다. ● 영국은 레이더망으로 독일군의 공습에 대처한 덕에 영국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 사람들의 처칠의 승리의 V사인에 열광했다. ● 미국의 연합군 참전으로 2차 대전의 전세는 바뀌기 시작했다.-.쪽
30초 SUMMARY
● 종전 후에 처칠은 소련의 '철의 장막'을 경고했다. ● 승리에도 불구하고 1945년 7월 총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다. ● 대역사서인 《제2차 세계대전》을 집필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 1951년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정권을 되찾았다. ● 1955년 노령과 건강 때문에 그는 정계에서 은퇴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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