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이자 고문실의 역사다. 인간은 신이 정해준 공간과 시간을 무시한 대가로 고문실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인간이 그 고문실에 붙여준 이름은 '배'였다."

해양강국 네덜란드의 언론인이자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1882-1944)이 저서 '배 이야기-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아이필드 펴냄)의 머리말에 쓴 첫 문장이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고대 전쟁 이야기에서 나오는 뱃노래나 선원들의 활약상도 극소수의 성공담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난폭한 바다에서 잔인하게 희생됐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가 전하는 '반휴머니즘적'이고 '살아있는 화석'인 배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부터 19세기까지 파란만장하다.

신전과 피라미드를 짓는데 필요한 거대한 화강암과 현무암 덩어리를 강 아래쪽으로 나르기 위해 배가 필요했다. "두개의 오벨리스크를 실을 수 있는 매우 큰 보트를 건조하기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나무들을 모아야했다"고 적고 있는 이집트 비문을 보면 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피흘렸을 노예들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배는 돈이 되는 장사였다. 낭비벽이 있던 루이 14세는 선대 앙리 4세가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서명한 '낭트 칙령'을 파기하고 신교 사냥에 나선다. 배를 저을 노예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중세를 거쳐 근대에도 배안의 풍속도는 나아지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선실의 풍경을 보자. "믿거나 말거나, 이들 12살짜리 어린이들이 자기 나이보다 4배쯤 많은 수병들 가운데 유능한 사람을 보고할 권리, 그리고 자신을 어리다고 우습게 생각했다는 심증만으로 수병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19세기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811년 이후 인간 매매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중죄인으로 취급돼 호주로 영구 추방당할 각오를 해야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영국전함에 나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기만 하면 곧바로 '노예화물'들을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저자는 배의 형식과 모양에 따른 구분법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그는 "배의 건조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변수는 노예제, 화약, 증기엔진 등 3가지 뿐"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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