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미술가 열전'(1550년)을 빼놓고 서양 미술사를 논할 수 있을까.

치마부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일생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책이 바로 '미술가 열전'이다.

'미술가 열전'을 통해 1250년 미술이 긴 잠에서 깨어난 트레첸토 시대의 치마부에와 지오토를 만날 수 있다. 또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회화의 마사초, 조각의 도나텔로가 날리던 14세기 미술의 성숙기를 엿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바사리와 동시대인이던 다빈치,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당시의 현대미술, 즉 15∼16세기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을 통해 역사상 최초의 미술사를 써내는 동시에 미술 비평의 언어와 방법을 창안했다.

'미술사 열전'은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단순한 목록집 차원을 뛰어넘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면밀히 검토하고 지성과 감수성을 발휘해 평가하고 자신의 열광을 전달한 일종의 미술사 소설이었다.

프랑스 그르노블 스탕달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강의하는 바사리 연구 전문가인 롤랑 르 몰레는 저서 '메디치가의 연출가 조르조 바사리'(미메시스 펴냄)를 통해 바사리라는 인물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바사리는 피렌체의 이미지를 만들고, 군주의 정책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시대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의 '기억'을 형성하고 남긴 사람이다. 붓과 돌과 글을 사용해 어떤 정치적, 세속적, 문화적 조직을 헌양함으로써 바사리는 피렌체 신화의 창조자들에게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목소리를 부여했다."

바사리는 단순한 미술사가가 아니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베키오 궁의 벽화를 그렸으며 바사리 화랑, 우피치 궁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바사리의 전방위적인 활약 뒤에는 당시 피렌체 공국의 통치자이던 메디치가 출신 코시모 1세가 있었다.

바사리가 예술가 뿐만 아니라 문화행정가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는 그와 코시모 1세 사이의 우정에 가까운 친분이 발판이 됐다. 코시모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고 바사리는 젊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서로의 재능을 결합하고 보충했다.

바사리와 메디치가의 인연, 예술과 권력의 결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소묘 아카데미' 설립이다. 1563년 출범한 소묘 아카데미의 첫 임무는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책의 저자 르 몰레는 바사리는 충실한 메디치가의 남자로 "모든 교황, 고위 성직자, 군주, 귀족, 그리고 대부르주아들에게 유용한 상담자요, 내밀한 벗이요, 완벽한 가신이요, 믿을 수 있는 심복이요, 영향력있는 실력자였다"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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