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 실비 제르맹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쩌면 작가의 이런 생각을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으로 들어간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는다. 그녀는 “쓰여지지 않은” 책 속에서 새처럼 날아오르고, 강과 물과 강둑의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프라하에 내리는 밤에 귀 기울이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세상의 물 위에 어리는 별그림자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모든 말과 사물에 깃들인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다.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 재능 있는 작가들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실비 제르맹은 그냥 재능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천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 책을 옮긴 김화영 선생은 2003년 봄, 소설가이자 갈리마르의 출판 선정회 위원인 로제 그르니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작가에 대해 좀처럼 과장된 평가를 하는 법이 없는 그의 예외적인 소개말에 이끌려 김화영 선생님 즉시 실비 제르맹의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중 처음 접한 책이 바로 이 책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였다.
작품의 제목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라는 말은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흔히 무덤 앞에 조각하여 세우는 ‘상복 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 속의 여자는 무덤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프라하의 거리거리를 울면서 돌아다닌다.
그녀의 뒤를 쫓으며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자취가 찍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프라하의 거리거리들, 그 모퉁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차츰 안개 속의 프라하라는 이국의 도시는 독자들의 내면의 풍경이 되고, 개인적 집단적 역사와 기억의 어둠 역시 깊게 파인다.

한 여자가, 거대한 여자가 프라하의 안개 속에서, “낮의 빛을 부식시켜버린 것 같은” 안개 속에서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헌 누더기를 펄럭이며……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여자는 가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저만큼 걸어가고 있지만 마치 투명인간과도 같다. “그녀에게는 어떤 물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푸드득 날개치며 날아오른 백조가 그녀의 몸을 공기처럼 관통하여 지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떠돌아다니는 개들처럼, 방랑자들처럼, 바람에 불려다니는 나뭇잎처럼 지나간다. 그녀가 지나가면 바람이 인다. 그녀의 발자국 속에는 숨소리가 나고 잉크 바람이 일어난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또 자취 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존재하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눈물과 집단적 기억의 압축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작품 속 화자의, 그리고 독자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어떤 추억, 명상, 작품의 분위기, 혹은 고통의 편린들이 솟아오른다.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경계지대의 신비적 비전, 실비 제르맹의 세계

어느 가을날 저녁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으로 한 여자가 걸어간다.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다.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은 두 세계 사이를 번갈아 딛고 가기 때문이다. 여자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대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 위에 한 발을 디딘 다음 다른 한 발은 언어의 세계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의 마음도 심하게 다리를 전다.
(……) 책을 덮으면서 ‘프라하’라고 발음해보라, 버림받음, 고통, 악, 역사, 연민 같은 말들이 그냥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흐린 거리 저만큼에서 절뚝거리며 울고 가는 거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는 고독, 부재가 환하게 밝혀지는 장소, 공허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를 내고 침묵이 노래하는 장소”임을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김화영

 아마존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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