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놔라! 내 발로 갈 테니". 총장이 부르짖는 목소리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아직 뭔가 남아있으리라는 권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체념하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키가 작은 그 인간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황소와 다름없었다. 이미 별 넷은 그 빛과 의미를 잃어버렸다. 높은 계급장일수록 힘을 잃었을 때는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행동대 몇 명이서 총장의 작은 몸을 차 안으로 떠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가쇼. 괜히 망신을 당하기 전에." 안타려고 발버둥치는 총장의 팔을 뒤로 확 비틀고 꺾어 승용차 뒷자리에 짐짝처럼 꾸겨 넣은 것은, 박운철의 우람한 어깨였다. 안경이 벗겨진 채 총장은 입에서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은 짐승끼리의 싸움에서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지 멀리 개 짖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그렇지만 사냥꾼의 수효는 많았고, 숨이 붙어있던 맹수들은 이미 풀이 죽어있었다. -.쪽
"실장님? 군인에게도 살 권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포로나 투항, 그 어느 것이든 인간이 마지막에는 스스로 자신이 선택할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만 진정한 군인이 아닐까요? 비인간적으로 인간방패를 만들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그렇게 했는데도 적을 막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중위는 차분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야! 김 중위, 너는 참으로 한심하구나. 언젠 우리가 우리 맘대로 살고 죽더냐? 우린 한낱 소모품이야." 이 소령이 내뱉는 말을 듣던 중위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산중턱들의 진지들을 떠올렸다. 지휘관마다 생각이 다르면 전략은 수정되었다. 죽어도 진지가 지켜져야 한다는 지휘관이 있는가 하면, 싸움이 붙으면 막 밀고 올라가야 하니까 임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지휘관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다 맞고, 다 틀릴 수도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들이 생각한 각본대로 판가름 날 것은 아니었다.-.쪽
이튿날도 안개는 여전히 깔려있었다. 계절이 바뀌려면 대지의 습한 기운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짙은 날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조차 한꺼번에 가려졌다. 사소한 사물들의 모습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수증기는 세상을 온통 덮여버렸다. 나는 그 뿌연 기운에 숨이 막혀 금방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하기야 그게 어디 순전히 안개뿐이겠는가. 바글바글 늘어만 가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오장육부의 썩은 냄새는 물론, 이 거대한 도시에서 무시로 내뿜는 매연이며 먼지 덩어리조차 잔뜩 섞여 있을 것이니까.-.쪽
사채업이나 임대업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인정머리를 다 베푼다면 걱정 없는 세상이지. 자신이 이런 데서 일을 하며 주워들은 상식으로는 돈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서웠다. 막일하는 사람들에게 제때 월급은 못 줘도 부동산은 계속 사들여야 하는 빌딩 주인이 그랬다. 돈놀이와 상품권 장사로 돈을 벌면서도,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몰래 훔쳐 자기 사무실에 놓고 쓰는 사채업자도 마찬가지였다.-.쪽
그녀가 껌을 잘강잘강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맞아요. 손 실장님이 제대로 말씀하시네요. 그래요. 하도 요즘 사회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니까 좀 뭣하지만… 말이야 바로 말이지, 뭣하게 통일을 하겠다고 저 난리들인지 모르겠어요. 서로 간섭 안하고 이대로 잘살면 되었지… 잘못하다간 양쪽 모두다 거지 꼴 나는 거지요. 독일 같은 선진국도 통일을 했다지만, 아직 서로 입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지 않은가요? 고조선 때부터 여러 번 갈라졌다가 무력으로 통일된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국민소득 만 불이 채 안 되는데, 거지같은 것들에게 퍼주다 보면 우리도 거지 꼴 나는 거지." 그녀들이 말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동복은 역겨웠다. 머릿속에 먹물깨나 든 것들이 더 이기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녀들에게, 무엇 하러 당신들은 결혼하고 사느냐. 혼자서 살다가 뒈지면 훨씬 인생이 편할걸. 속 썩이는 새끼들하며, 거추장스런 남편 걱정일랑 없이 혼자서 하고 싶은 짓 맘대로 하고 살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기야 그녀들은 말하는 투로 보아서 맘대로 사는 여자들 같았다. 당장 개인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실속을 차리며 사는 편이 현명한 노릇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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