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명사는 인류사가 시작한 이래로 인류가 여행을 하고 있는 고속도로와 같다. 모든 고속도로가 그렇듯이, 곧게 뻗은 도로가 아니라 굴곡과 굽이들, 구릉과 계곡들, 그리고 이정표들로 두드러진 도로이다. 역사의 이정표들은 홀로 서 있는 기둥이 아니다. 오히려 죽 늘어선 도미노에 좀더 가깝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은 오직 앞선 사건들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문명의 소멸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꾸로 그리스 문명의 엄청난 번성을 가져와 서구 문화의 토대가 된 철학을 낳았다. 워털루 전투와 두 번의 세계대전은 역사의 행로를 바꿨다. 증기 엔진과 비행기의 발명 또한 그러했다. 행성간 우주선의 비행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우리 지구 행성에 완전히 새로운 조망점을 제시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건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각 사건들이 일어난 뒤 세계는 영구히, 그리고 극적으로 바뀌었다. 만일 이 책이 유럽 중심적이라면, 역사를 바라보는 서구의 개념이 동양처럼 순환적이기보다 선형적이기 때문이고, 그런 방식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 탐험가들이었고, 변화의 촉매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는 유럽과 중국 사이의 길을 텄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문을 열었다. 만일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가는 무역로를 개방했거나, 수족이 영국이나 일본을 식민지로 삼았더라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쪽
최대의 제국, 로마가 탄생하다 B.C. 753
● 로마제국은 아마도 19세기 이전 서양사에서,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단일체였을지 모른다. 로마는 모든 서구 유럽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 현재의 스코틀랜드에서 지브롤터까지, 라인란트에서 흑해까지, 터키에서 북아프리카 전역까지, 그리고 지중해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 사실, 지중해의 바닷물이 닿는 모든 해안들이 로마의 영역이었다.
● 로마의 정치 조직, 문학과 심지어 로마자까지도, 뒤를 이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있기 전에,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도시 로마가 있었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가 세워졌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내려왔는데, 이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확증된 사실이다.-.쪽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B.C. 4-A.D. 30
● 당시 로마 지배 하의 팔레스타인이었던 베들레헴에서 기원전 4년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종교를 창시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16억 명의 크리스트교도들이 있는데, 이는 세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유대인의 전통 ─ 그 속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 은 유일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들과 달랐다. 유대인들은 그밖에도 유일신 ─ 야훼로 알려졌다 ─ 이 자신들에게 메시아, 즉 구세주를 보내 모세가 자신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풀어주었던 것처럼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신의 은총 속에서 다시 태어나 영원한 낙원인 천국으로 갈 수 있게, 지상의 인간들을 대신해 희생하려고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크리스트교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세계사의 중추적 사건이었다.
● 크리스트교도들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유대교의 경전들을 받아들였고, 이 경전들은 크리스트교 성경의 구약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 종교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갈라선다. 크리스트교 성경의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그의 제자들 중 주로 마태오, 마르코, 루가와 요한이 이를 기록했다.-.쪽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1909
● 사람들은 한때 지구는 평평하고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믿었다. 비록 이런 믿음들에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이론들은 이단으로 취급되었지만, 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지구가 평평하지도, 동그랗지도, 태양계의 중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사람들은 시간은 절대적이고, 제대로 태엽이 감긴 시계는 어디서나 똑같은 속도로 가며, 빛은 항상 일직선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했다.
● 이런 가정들은 독일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에 의해 뒤집혔다. 그는 일반적으로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이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 사실, 그의 상대성이론은 1909년에 초보적인 형태로 출판되었는데, 너무 복잡해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관찰자가 이동하는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 빛이 이동하는 속도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은,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되면, 방출된 에너지는 간단한 공식 'E=mc² '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c'는 빛의 속도를, 'm'은 질량을 나타낸다. 공식은 작은 질량이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핵무기와 핵에너지 생산을 위한 원자로 개발 방법을 수학적으로 보여준다.
● 핵에너지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발견들은, 만일 태양이 실제로 불타고 있다면 수년 전에 몽땅 타버렸을 것이라는 점을 보임으로써, 별들의 본질을 아울러 설명해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핵반응에서 빛과 열의 엄청난 양들은 질량을 최소한으로 손실하면서 계속 생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비록 그의 이론이 극단적으로 복잡하긴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로 상대성을 설명한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아인슈타인 본인에게서 나왔다-.쪽
인류를 구한 곰팡이: 페니실린의 발견 1928
● 1914년 영국 육군 의무대에 복무를 자원한 미생물학자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은 너무나 많은 부상병들이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깊은 상처를 고통스럽게 참아내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 부상병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세균들을 박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쓰고 있던 방부제와 항생제는 박테리아를 죽이긴 했으나, 동시에 인간의 세포 역시 파괴했다. 그 때문에 전시에는 외상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방부제와 항생제는 오로지 외상에만 사용되었다.
●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좀더 효과적인 항생제 탐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는 침투하는 세균과 싸우려면 환자에게 손상을 입히는 가성 화학물질이 아닌 유기물을 갖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론화했다. 그리고 인체에서 발견되는 물질 혹은 분비액 자체가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었다.
● 1921년 일련의 연구를 진행한 결과 그는 리소자임에 주목하게 되었다. 리소자임은 사람의 눈물에서 나오는 분비액으로 일부 박테리아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포도상구균과 연쇄상구균, 그리고 임균과 같은 가장 위험한 박테리아에 대해선 그렇지 못하였다. 플레밍은 연구실에서 세균 배양용 작은 페트리 샬레에 갖가지 유기물들을 놓고 실험을 계속했다. 가끔씩 페트리 샬레는 공기 중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곰팡이 포자와 박테리아에 감염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샬레를 닦아내고 다시 실험을 시작하곤 했다.
● 그러던 1928년 어느 날,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담은 접시에서 박테리아가 특이한 곰팡이에 의해 이미 공격받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연구 끝에 그 곰팡이가 접촉하는 거의 모든 박테리아를 분해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페니실리움 노타툼(푸른 곰팡이류)은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항생제 페니실린을 낳았다.-.쪽
검은 화요일과 대공황 1929
● 세계 경제 동향의 성격은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주기적이다 ─ 경기 호황은 경기 침체와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경기 침체도, '검은 화요일'로 알려진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 시장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공황만큼, 깊이 추락하여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 1920년대의 10년간은 전세계의, 특히 미국의 경제적 팽창기였다. 20세기가 되기까지 미국의 경제는 대체로 유럽과 독립적이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전례 없이 유럽 강국들과 연합했고, 미국 상품에 대한 수요 ─ 특히 농산물 ─ 가 유럽에서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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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적으로, 미국은 농업은 물론 제조업과 금융업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개인과 기관들 모두 전례 없이 투자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주식 시장에 있는 회사들의 주식 가치는 급격히 상승했다. 실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중개 회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주식을 팔기 위해서, 장래의 매수인들이 주식 가격의 일부만을 지불하고 주식 가격에 대해 나머지를 차용함으로써 위탁 증거금으로 주식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비록 오늘날 이런 관행은 매우 의심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당시 주식의 가치는 오로지 상승만을 계속했고 또 매우 빨리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구매 가격의 두 배 혹은 세 배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윽고 미국의 경제는 거대한 신용 팽창이라는 거품으로 바뀌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난 농부들이 다시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했고, 미국 상품들에 대한 수요는, 비록 미국의 농장들이 좀더 효율적으로 산출량을 늘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급락했다.
● 1929년 10월 24일 현황판의 주식들이 폭락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경제의 거품이 터지고 말았다. 너무 많은 신용에 비해 너무 적은 지분과 실질 화폐 때문에, 개인과 법인의 재산은 24시간 만에 사라졌다. 월가에서는 갑자기 무일푼이 되었음을 알아차린 많은 투자자들이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월가에서 시작된 파장은 곧 나라를, 그리고 결국엔 세계를 삼켜버리는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은행들은 파산했고, 농산물 가격은 무너졌고, 기업들과 공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해외 무역은 사라졌다.-.쪽
2차세계대전의 시작 1939
●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며 모든 것을 앗아간 인류의 가장 큰 전쟁인 2차세계대전 역시 이전의 수많은 전쟁들을 일으킨 것과 똑같은 종류의 정치ㆍ경제 권력을 향한 탐욕에 의해 촉진되었다.
● 이탈리아는 새로운 로마제국을 건설할 꿈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중부 유럽에 더 많은 생활 공간을 갖고 싶어했다. 일본은 자국이 대동아시아 공영권의 새로운 중추가 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국가들은 서로 한데 뭉쳐 로마-베를린-도쿄 추축, 혹은 간단히 추축국으로 알려진 연합을 구성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31년에 만주를 병합했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목표는 1500년 만에 실제로 로마에 근거를 둔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는 것이었으며, 이미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정복했다. 한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한번에 한 걸음씩 영토를 넓히려는 자신의 목표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1936년 히틀러의 군대는 베르사유 조약을 직접 위반하면서 독일의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적극적인 반대가 없자 그는 더욱 힘을 얻었다. 1938년 3월 그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독일의 일부로 취했고, 1939년 3월 그의 군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가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제기했다지만, 전쟁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던 터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 1939년 8월 23일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에 전면 공격을 감행했다. 이쯤 되자,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했으므로, 독일에 공격을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최후통첩 후에도 폴란드에서 여전히 전쟁 상태가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고 발표했다. 대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쪽
원자폭탄과 2차세계대전의 종결 1945
● 영-미 연합군은 1945년 초에 전장을 독일로 옮겨 3월 8일에는 라인 강 둑에 다다랐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휩쓸었고, 동부전선에서 베를린 쪽으로 다가왔다. 4월 19일 러시아군과 미국군은 엘베 강에서 만났고, 베를린은 결국 포위되었다. 히틀러는 4월 30일 자신의 요새화된 벙커에서 자살을 기도했고, 5월 7일 독일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 독일을 패배시킨 연합군은 일본제국을 정복하는 데 관심을 돌렸다. 미국 군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일본은 태평양의 섬들을 방어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연합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재탈환하는 데는 수백만 명 ─ 대부분 미국인들 ─ 이 희생을 치러야 할 것으로 추정했다. 1945년 4월 12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대통령이 된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은 그런 비관적 전망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이 즈음에 미국은 핵무기(당시엔 원자폭탄으로 알려졌다)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다. 트루먼은 각료 및 수석 군사 고문들과 함께 원자폭탄 두 개를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술을 취하면 일본이 즉각 항복할 것이고 나아가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군사 작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쪽
● 8월 6일과 9일 미국의 B-29 폭격기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첫 번째 폭탄은 히로시마에, 다음 것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TNT 5만 톤의 파괴력을 지닌 폭탄들은 기대했던 효과를 가져왔다.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전언을 보냈다. 공식적 항복은 1945년 9월 2일에 서명되었는데, 이날은 '종전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서명식은 도쿄만에 정박한 연합군 함대의 중간에 있던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진행되었다.
●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지만, 어렵게 얻어낸 평화의 이면엔 핵무기의 끔찍한 파괴력이라는 불길한 유령이 숨겨져 있었다.-.쪽
지구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밟은 인류 1969
● 우주 공간에서 인간이 숨쉴 수 있다는 꿈을 이룬 뒤, 미국과 소련 양국은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소련이 기울인 노력이 거의 30년간이나 장막에 덮여 비밀로 유지되었던 데 반해, 미국의 프로젝트는 대중들에 널리 알려졌다.
● 1960년대 중반에 양국은 한 명 이상의 승무원을 태울 수 있는 유인 우주선을 개발했고, 성공적으로 날려 보냈다. 유인 우주선 개발은 달까지 날아가는 비행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개발해 미국에 멋지게 한방 먹이며 우주로 보내자, 미국은 1965년과 1966년에 2인승 제미니호로 10여 차례의 비행을 성공리에 마치며 앞서 나아갔다. 그 중엔 1970년대 초반까지 절대 깨지지 않던 330시간 짜리 비행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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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달 왕복 임무를 위해 아폴로 우주선을 만들었다. 아폴로의 임무는 승무원 세 명을 달 궤도까지 싣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 후 두 명이 달 표면까지 다시 비행을 하고, 며칠 동안 머물다가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나머지 동료와 재합류하는 계획이었다. 최초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7호는 1968년 10월에 지구 궤도에서 시험 비행을 했다.
●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는 달까지 날아간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프랭클린 보먼과 제임스 러벨, 그리고 윌리엄 앤더스는 다른 세계의 궤도를 돈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아폴로 8호는 달 착륙까지는 계획하지 않았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1969년 초와 1969년 7월 16일에 두 번의 심화된 시험 비행을 거친 후, 아폴로 11호는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인간을 최초로 달 표면까지 싣고 가는 임무를 안고 발사되었다. 7월 20일,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 )과 올드린은 마이클 콜린스를 달 궤도에 남겨두고 달 표면으로 내려 갔다. 몇 시간 뒤, 암스트롱은 지구 밖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쪽
여기저기 널린 컴퓨터 1981
● 컴퓨터는 1980년대 이래 현대 문명의 면면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한때 '전자 두뇌'라는 비유적 명칭으로 알려졌던 이 기계는 동시에 많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확장했던 것처럼, 컴퓨터는 사람의 계산 능력의 한계를 확장함으로써 수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 1937년 미국 엔지니어인 하워드 에이컨은 IBM Mark 7을 설계했는데, 지금 사용되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할아버지 격에 해당된다. IBM Mark 7은 전자식 스위치들이 아닌 진공관과 전기기계식 스위치들을 사용했다. 최초의 진정한 전자식 컴퓨터는 2차세계대전으로 촉진된 기술적 붐의 결과로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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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는 콜로서스 I로, 영국의 튜링과 노이만이 1941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만들었다. 콜로서스 I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암호를 푸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43년에는 추축국 암호들을 풀어냈다. 콜로서스의 뒤를 이어 1942년에 나온 30톤 무게의 에니악은 최초의 진공관 컴퓨터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다니던 존 모클리와 존 프레스퍼 에커트가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고 개발한 것이었다.
●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전자 컴퓨터는 유니박으로, 역시 모클리와 에커트가 1951년에 설계했다. IBM이 1959년에 판매한 IBM 1401은 재계와 산업계에서 기계식 상업용 기계들을 대체한 최초의 컴퓨터였다. 트랜지스터 컴퓨터는, 성가시고 잘 깨지는 진공관을 튼튼한 트랜지스터로 대체한 것으로, 1958년에 크레이가 컨트롤데이터사를 위해 설계했다. 이것은 기술 개발이 전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더 빨라진 컴퓨터를 만드는 방향으로 바뀌는 효시가 되었다. 크레이는 나중에 자신의 회사를 차렸고 계속해서 최신 슈퍼컴퓨터들을 개발했다. 1975년에 소개된 크레이 1호 슈퍼컴퓨터는 초당 1억 번 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1985년에는 크레이 1호를 능가하는 크레이 2호가 나왔는데, 초당 12억 번 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 그 후에 나온 CM200 슈퍼컴퓨터는 초당 90억 3천만 번 연산을 처리하였다.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를 둔다는 생각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남쪽 산타클라라 계곡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실리콘 밸리로 알려지게 되는 운명적인 계곡이었다. 1976년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차고에서 가정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컴퓨터 보드를 만들어서 애플 I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역의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소량을 제작하여 팔기 시작했다. 1977년 초에 잡스와 워즈니악은 애플컴퓨터를 설립했고, 그해 4월에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II를 내놓았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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