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조우석] 혁명을 팝니다
조지프 하스·
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마티, 460쪽, 1만7000원
"매트릭스는 시스템이야, 네오. 시스템 주변을 봐. 뭐가 보이지? 사업가.교사.변호사들, 우리가 구하려는 게 이들의 정신이야.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이들은 여전히 시스템의 일부이고, 우리의 적일 뿐이지. 이들은 너무도 길들여져있어…."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그렇게 잘라 말한다. 코앞의 세상이란 백일몽이자 덧없는 환영(幻影)이라는 것, 따라서 매트릭스의 악몽을 벗어나 진짜 세상과 온전한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빨간 약'을 복용해야 한다. 불교철학과도 닮은 꼴인가 싶었지만, 신간 '혁명을 팝니다'는 손사래부터 친다. 그건 1960년대 이후 서구를 휩쓴 반문화(counter culture)운동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반복한 것일 뿐이다.
반문화 운동. 상업광고가 세속의 신(神)으로 등장했고 진부해진 매스미디어로 뒤덮인 세계, 그런 짜증나는 주류문화를 총체적으로 거부하자는 움직임이다. 누가 그러느냐고? 생각보다 많다. 신간에 따르면 "한 순간에 타버리는 게 낫다"는 말과 함께 자살했던 록 음악가
커트 코베인이 그랬다.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영화 '
아메리칸 뷰티' 역시 "반문화 이데올로기의 복사판"(71쪽)이다. 정리해고 직전의 중년남자 레스터 번햄과 이웃 청소년 리키 피츠를 기억해 보라. 그들은 마약 복용 등 일탈 행동을 능사로 하지만, 주류사회에 반항하는 '좋은 사람들'로 설정했다. 저자들이 보기에 그 영화야말로 30년 전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함께 형성된 히피(반문화) 대
파시스트(체제.국가)의 얼치기 이분법일 뿐이다.
예술만이 아니다. 반문화운동은 지구촌에서 극단적인 환경운동과 유명 브랜드 반대 운동 등 반(反)소비주의로, 과격한 반세계화 움직임으로 표출된다. 신발업체 나이키는 그들의 주공격 대상. 제3세계 노동 인력에 대한 착취방식으로 제조되면서 "자본주의 질서의 잘못된 모든 것을 상징"(11쪽)하는 것으로 낙인 찍혔다. 반세계화론자들이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시애틀 총회 때 나이키매장을 공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주류질서 옹호의 보수주의 깃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연구(culture study)와도 다르다. 사회철학 분야의 썩 괜찮은 서적이다. 요즘 철학서들은 이처럼 섹시하다. 동유럽 철학자 슬라보에 지젝처럼 대중문화의 화젯감을 현란하게 인용한다. 그러면서도 논의의 격조를 유지한다. 저자 두 명은 독일의 비판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들.
각기 67년, 70년생인 이들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반문화 운동의 철학적 족보를 들춰보이면서, 미셸 푸코(심리학자
프로이트와 함께 반문화 운동의 이론적 아버지로 지목된다) 등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그런 현학적 대목도 매력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책의 메시지다. 뭉뚱그리자면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체제 전복 등 '불온한 꿈'대신 미시적인 조정과 개혁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주문이다. "잘못된 반문화의 이상에 헌신"(422쪽)해온 서구의 진보 좌파들에 대한 통렬한 공격도 볼 만하다. 책을 손에서 놓고나니 조금은 우울해진다. 답답한 세상을 탓하며'빨간 약'을 복용해온 위약(僞藥)효과마저 끊어야 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싶어서다. 어쨌거나 찬반의 입장과 상관없이 문제제기로는 썩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