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소주 다섯 병 마실 수 있다 - 최승은 시집
최승은 지음 / 이레 / 2001년 7월
절판


태초의 새 한 마리


새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새는
자기 몸에 날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있는 곳,
한 뼘 새 둥우리
세월 지나 감각조차 없는 날개
퍼덕여보지만
절망으로
모서리에 부딪칩니다

가엾은 새, 내
모습입니다

=>날개가 있는데, 없다고 믿는것보다 없어도 있다고 믿는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쪽

선녀가 셋째 아가를 낳지 않은 사연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아시나요?
사슴이 말했습니다
"아이를 셋 낳기 전까지는
절대루 날개 옷을 내주지 마세요"

만일 아이가 셋이었다면
선녀는 날개 옷이 있어도 하늘로 날아가지 못했을 거예요
두 팔에 세 아이를 안고 어떻게 날 수 있겠어요?

사랑스런 나의 세 아가

그리고 당신은 말합니다
"자, 당신 날개 옷 여기 있어
이젠 맘대로 날아가도 좋아…"

=>마지막 행이 마음을 콕 찌르네요.-.쪽

바람난 엄마


나,
바람이 났나 보다
바람 앞에 나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질끈 눈을 감는 망각 속에서
살갗을 간지럽히는 상념,
웅크린 시간의 여운마저도
부드럽게 휘감는 한 자락 바람,
사소한 일상을 어루만지는 손길

지쳐 버린 내 나이가 훈장은 아니지만
살 같은 세월 앞에서도 다소곳이 나설 수 있는 까닭은
바람난 엄마의 해묵은 소원,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
정말로 바람이 난 것 같다
날개마저 버리고 훨훨 날 수 있는,
그날이면 부서진 내 꿈 틈새로
어렴풋 새살이 돋아나겠지

=>제목이 어쩌면 부도덕하게 느껴지지만, 내용은 아름답다고 느껴지네요.-.쪽

어떤 날


별일도 아닌데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이
괜스레 억울한 날

화날 일도 없는데
너무나 분해서
가슴이 둥둥 뛰는 날

왜 이럴까,
나이 탓일까
뒤돌아볼수록 누추해지는 모습

어떤 날

밥만 많이 퍼먹고
'괜히 먹었다'
엄청 후회하는 날-.쪽

우리 사랑이 서글픈 이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과 나는
기뻐도 슬퍼도
말이 없습니다

서로의 모든 것이
너무 쉬워서
다가갈 이유조차 없는
우리

결혼 17년
그 사랑이 서글픈 이유는
당신과 내 안에
이미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쪽

나는 이럴 때 신나지롱!!!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침묵하는 순간의 괴성,
소음 속의 명상,
단아함 속의 들키지 않는 파격,
따뜻함을 가장한 무관심,

당신을 배신하는 상상-.쪽

Women talk 2


사랑
결혼
내조
아이들
시집살이
잔주름
추억
그리움

그 뒤에 남겨진 이야기

JSA 공동경비구역
J - 정말로
S - 사랑만은
A - 않겠어요-.쪽

내 책은 내가 산다


누가 그랬는지,
아줌마들은 자기 돈 내고 책 안 산다고

그럼 아이들 그 비싼 영어 교재며
학습지 값, 학원비, 과외비는
다 어디서 나오는지

쥐어짜도, 한푼 여유 없는 삶
'아줌마'는 그저
책과는 거리가 먼
퇴행성 문화 지체계급

하지만,
이제부터
내 책은 내가 산다
콩나물 값을 아껴서라도
이제부터 내 책은
내가 알아서 산다-.쪽

새가 날아가는 의미


날아간다
날갯자락에 구슬처럼 '사는 의미'를 달고
새가 날아간다

빠끔히
하늘이 열리고
빈 가슴엔 한바탕 소낙비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긋던 새는
그 '의미'가 몹시도 무거웠던지
힘겹게 내려놓고
또다시 날아간다

서글퍼진 '의미'는
그저 혼자서
해질녘까지
비를 긋고 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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