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관한 담론은 1980년대부터 서구 인문학계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해 문학은 물론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도 활발하게 소화돼 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몸을 정신의 하위에 두는 전통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몸 그 자체로 대접하자는 내용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의사와 간호사’(Human & Books)는 영국 여성작가 루시 엘먼(50)이 이러한 담론을 한 단계 더 숙성시켜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흥미롭게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우리의 주인공 여성 ‘젠’은 “늘 숨이 찼고 악취를 풍겼지만, 살이 너무 쪄 문을 통과하지 못할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머리를 만질 때마다 가벼운 눈송이 같은 비듬이 떨어졌지만, 모든 머리칼이 갈라지고 곱슬곱슬하고 닳았으며 목이 턱과 구별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간호사였다.”(24∼25쪽)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말을 믿기에는 그녀가 너무 살이 쪘다”는 것이다. 동정을 받지 못하며 지구를 걸어 다니는 그녀에게 “ 모두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자신의 성기를 책임지는 것뿐”이다.
이 여성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돼버렸을까? 이런 질문은 ‘전통적’이고 ‘평범한’ 사고를 지닌 이들이 ‘자연스럽게’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젠은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 그 혐오의 대상에는 자신도 포함돼 있다. 젠의 어머니가 산후우울증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을 때 그녀는 열차에 홀로 남겨진 살찐 아기였다. “자신이 어머니를 미치게 했고, 자살로 내몬 것만 같았다. 그후로 젠은 결코 행복해지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그것을 보상하려 해왔다.”(62쪽)
설마 아기가 피둥피둥 살이 쪄 있다고 그것 때문에 엄마가 자살까지 생각했을까마는, 적어도 젠에게 주입된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추함, 혐오와 사랑이 갈라지는 단순한 기준은 인습에 의해 설정된 외피임에 틀림없다. 그 원죄 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 불화하게 만든 무의식이자, 세상과 싸우게 만드는 에너지로 작동한다.
그녀가 지방 소도시에서 취업한 병원의 의사 로저 박사는 잘생긴 남자다. 그러나 그는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매일 같이 죽이고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엉뚱하게도 살려내는” 돌팔이다. 한마디로 몸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부류에 속한다. 그가 젠과 ‘몸의 사랑’에 빠진다. 그는 불행하게도 “숱한 성형수술에서 회복되느라 의식이 없었거나 의식이 있을 때면 미친 여자였으며, 검고, 젖어 있고, 냄새를 풍기고, 때가 낀”(199쪽) 아내
프란신과 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젠은 엽기적이지만 싱싱하고 자연스런 육체를 지닌 성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구도로 설정된 이 소설은 서사를 따라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곳곳에 몸에 관한 독설이 지뢰처럼 깔려 있는데, 책장을 넘기다가 줄곧 밑줄을 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독서가 더디어질 정도다. 몸이 없으면 우리가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400여종의 각종 질병과 증상을 20여쪽에 걸쳐 시를 쓰듯 나열하는가 하면, 몸의 자유를 위한 세심한 처방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젠은 로저 박사와 결혼 해프닝을 거쳐 소읍의 사람들을 몸에 관한 주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맡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려 독방에 갇힌다.
내면 심리를 파고드는 독특한 소설을 써온 작가 정영문씨가 이 작품의 번역을 맡았다. 정씨는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이 독창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몸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의 몸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라며 국내에 처음 소개된 영국작가 루시 엘먼의 다른 작품들에도 강한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이 소설은 판타지 같은 코미디 형식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예리하게 벼려진 사유의 칼날과 핵심을 찌르는 잠언 같은 구절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영국 작가의 만만치 않은 깊이를 가늠케 한다. 보너스로 덧붙이는 루시 엘먼의 독설 하나.
―그들(남자들)의 유일한 생물학적 목적은 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