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안소민 기자] "옛날엔 고기들도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소고기 한 근만 사서 무 하나 썰어 넣고 연탄불에다 오래 끓이면 국물이 뿌옇게 우러나서 식구들이 몇 날 며칠을 맛나게 먹었다. 요즘 고기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질기고 맛도 없는지. 원... 잡채라 해야 뭐 별 거 넣기나 했는 줄 아니, 요즘같이 고기가 흔한 것도 아니고 기껏 당근하고 양파, 시금치만 넣어서 무쳐놓아도 다들 맛나게 먹었단다."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푸짐하게 한 상 차려놓은 음식들을 드시면서 시어머님은 가끔 이렇게 말씀을 하곤 해서 땀 뻘뻘 흘려가며 음식 장만한 며느리들을 김새게(?) 만들기도 하셨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알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워하는 것은 비단 그 시절의 고기국과 잡채 그 자체가 아님을. 어머님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의 추억들이었다.

 
▲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싶구나> 겉그림
ⓒ2006 디자인하우스
음식에 얽힌 추억 한가지쯤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황석영의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는 작가 황석영의 음식에 얽힌 추억들이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음식과 추억은 한 덩어리가 되어 진하고도 맛깔 나게 버무려져 있다. 그 둘은 때론 구수하고 달콤하게, 때론 목 메이도록 안타깝고 구슬프게 엮여 있다.

'우리는 모든 맛을 잃어버렸다.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의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의 최상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식가나 식도락자를 '맛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규정한다. 마치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끝없이 헤매는 돈주앙처럼 말이다. -머리말 중에서-

가난했지만 인정만은 넉넉했던 맛의 추억들

젊은 시절, 지은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잊지 못할 여인들과 나누었던 음식들은 첫사랑의 풋풋하고 애틋한 맛으로 그의 기억에 남아있다. 안면도 해변에서 그녀와 함께 먹었던 보리미역냉국, 젊은 시절 작가의 자폐증을 치유해주었던 그녀와 초겨울 어느 산장에서 처음 맛본 고들빼기김치, 외롭고 허전했던 타향살이 중 만났던 어느 소녀가 알려 준 장아찌의 깊고 다양한 맛은 흘러간 옛사랑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외롭고 고독한 독일망명시절 지은이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인심과 정이 듬뿍 담긴 그들의 요리였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 아닌 서양 어느 가정과 여염집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자연의 싱싱함과 풍요로움이 가득 담긴 음식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었다.

작가가 스페인 여행 중 만난 안달루시아 토속음식들은 정열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삶의 강한 욕구를 느끼게 했다고 한다. 이태리 음식과 요리의 특성을 각 지방별 소개해놓은 부분에서는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지은이의 안목을 느낄 수 있다. 비록 나라와 문화는 다르지만 음식 근본에 담겨있는 깊은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음식은 다 통하는 걸까?

'심야의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모두 문을 닫았고 우리는 어느 노천 카페에 앉아 '마늘 수프'를 먹었다. 그야말로 우리 뚝배기처럼 생긴 질그릇에 뜨거운 수프와 빵을 내왔는데 어두워서 내용물은 자 보이지 않았지만 묵은 치츠 냄새며 마늘이 어우러져 된장찌개 맛이났다.'(61쪽)

그런가 하면 군대시절과 수감시절, 근근이 끼니를 이었던 그 시절 먹거리의 추억은 황량하기만 하다. 그러나 궁핍과 열악함 속에서도 먹거리에 관한 진하고 따뜻한 추억이 있어 그리 쓸쓸하고 메마르지만은 않다. 단식 후 먹었던 된장보리죽, 삶은 라면발에 두유를 부어서 만든 콩국수, 국에서 건진 두부와 콩나물, 김치, 삶은 돼지고기로 만든 만두, 석방되던 마지막 해 눈 오는 날 부쳐 먹었던 김치전에 관한 추억은 어두운 감방에 비쳐든 한 줄기 햇살처럼 따뜻하고 눈물겨운 것들이다. 한창 식욕이 왕성하던 시절, 남몰래 건빵 다섯 봉지를 먹다가 다음날 아침 숨 막혀 죽은 훈련병의 이야기는 건빵의 그것만큼이나 읽은 이의 목을 메이게 한다.

치기어린 시절, 가출해서 어느 절에서 먹었던 절밥의 추억, 10여 년 간 둥지를 틀었던 해남에서 맛보았던 종류도 다양하고 맛깔스러웠던 남도의 음식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넉넉하고 소박했던 이웃들의 모습,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만드는 각종 젓갈들에 얽힌 추억, 제주도에서 만난 돋통시(똥돼지), 지은이가 '오감을 일깨워 흔들어 버리는 맛의 혁명'이라 표현한 남도의 삭힌 홍어는 듣기만 해도 입에 침이 괴일 정도로 읽는 사람의 식욕을 자극한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맛본 북한의 진귀하고도 다양한 음식들 또한 이채롭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바로 '언 감자국수'이다. 세계에서 하나 뿐인 '언 감자국수'는 언 감자를 우려내어 녹말을 낸 다음 끓는 물에다 국수를 뽑아서 차디찬 콩물에 말아먹는 것이다. 위에는 검은 깨를 뿌리고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서 먹는데 여기에는 6·25 당시 인민들의 배고픔과 애환이 담겨있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루이제 린저가 '감자요리로 유명한 독일에도 이런 요리법은 없다'고 말했다는 그 음식.

어머니는 고향을 그리워하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광주에 살던 시절 모시고 있었는데 광주 사태 있고 나서 내가 당국의 권유로 제주도에 유배 비슷하게 머물던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암이라서 식구들도 모두 포기하고 병원에서 모셔 내다가 진통제나 놓아드렸다. 문득 아내가 내게 '노티'가 뭐냐고 물었다. 글쎄… 그게 뭘까, 했더니 그네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노티를 꼭 한점만 먹고 싶구나." (199쪽)

음식에 얽힌 과거를 더듬어가다 지은이는 '노티'와 관련된 어머니의 추억에 이른다. 이북이 고향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 노티를 그렇게 그리워했다. 어머니 뿐 아니라 월남한 어머니 형제들은 명절날이나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면 어렸을 적 먹었던 '노티'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훗날, 지은이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 형제들과 상봉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모에게 어머니의 노티 얘기를 전하고 다음날 이모는 노티를 만들어서 지은이에게 전한다. 음식은 이처럼 수십 년 만에 만나는 혈육을 더 진하게 이어주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지은이가 말하는 '노티'

요즈음은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 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 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을 넣어서 반죽을 한다.

반죽을 아랫목에 한두 시간 덮어 두어 삭힌 다음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만들에 약한 불에 지져 낸다. 이것을 식혀서 꿀에 재어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서 장독대에 내다 놓고 먹는다고 한다. (206쪽)

그뿐인가. 이 책에는 비록 빈곤했지만 사람 사는 정 하나만은 넉넉했던 우리네 지난 시절 밥상의 모습이 담겨있다. 장에라도 다녀오실라치면 기분 좋게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고등어,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밥 한 끼 푸지게 먹어보고자 만들어먹었던 김치밥, 콩나물밥, 감자밥, 허름한 양은냄비에 남은 반찬 모두 넣고 참기름 넣어 싹싹 비벼먹던 양푼비빔밥, 한차례 노동을 하고 나서 여럿이 둘러앉아 먹던 들밥 등 그 하나하나가 모두 그립고 정겹기만 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음식은 구하기 힘들거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먹었던 값비싼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이다. 다만 거기에는 지은이만의 정다운 추억과 애틋한 그리움이 담겨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오늘 우리가 먹는 밥 한 끼, 먹을거리 하나도 훗날 뒤돌아보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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