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기 기자 = "히힛, 제가 꽤 나무를 잘 탄답니다. 시골촌놈이라요. 제 어릴 적 별명이 그래서 타잔이었어요. 왜 영화 '타잔' 나왔을 때 극장 몰려가서 보고 그랬잖아요. 정말 제 우상이기도 했죠."(89쪽)

김윤영(35)의 두 번째 소설집 '타잔'(실천문학사)에는 외롭고 슬픈 현대인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마장동 김씨'는 어린시절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통해 만났던 '타잔'을 마음속 우상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정글을 그리워하던 그는 단체 여행객의 일원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유적을 방문했다가 실종된다.

일행을 애태우던 그는 실종된지 12시간만에 나타난다. 그러더니 이렇게 변명한다. "오랜만에 나무를 타다 보니까 그것도 재미있더라구요. 그래서 이 나무 저 나무 옮겨가다 보니까 왔던 길이 안 보이는 거예요"라고.

소설은 '타잔을 꿈꾸던 푸줏간 주인'의 처절한 몰락을 그렸다. 작중 화자인 '나'는 앙코르 와트 관광안내를 하다가 만났던 '마장동 김씨'와 우연찮게 다시 만나는 과정을 통해 그가 비정한 현실세계에서 내쫓기는 모습을 그려보인다.

순박한 노총각이던 김씨는 빚을 갚아주고 술집에서 빼낸 예쁘장한 여자와 결혼해 곱창집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곱창 다듬는 것 싫다고 징징거리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대학가에 '우아한'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열지만 실패하고 만다.

"시골 아저씨 같은 주인이 가게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술집 아줌마 같은 아줌마가 다 먹었으면 나가요, 하는 것처럼 째려보고 앉아 있으니 분위기가 황이라고 소문"이 났고, 그런 뒤 젊은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다.

커피점에서 화장품가게로 업종을 바꾸는 등 업종을 전전하던 김씨는 텔레비전 홈쇼핑 중독으로 카드를 마구 긁어댄 아내의 낭비벽을 이기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어 파산하고 만다. 결국 사채를 얻어썼다가 기하급수로 늘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내는 도망간다. 김씨는 빚을 받으러온 폭력배들에게 "천 만원에 손가락을 하나씩 잘리는" 상황까지 이른다.

"마장동 김씨는 많이 배우거나 커다란 목표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같은 소망을 갖고 도시적 삶에 회의를 품고 있는 순진한 인물이죠. '타잔'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인물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하나둘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이런 소설을 써보았습니다."

소설속 '마장동 김씨'는 타고난 낙천가여서 시시각각 닥쳐오는 불행에 대해서도 언제나 의연하다.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는 도망가버린 아내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그의 모습은 부활한 돈키호테 같다. 아내는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의 전형이지만 그에겐 여전히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 공주'인 것이다.

"배운 사람들은 '마장동 김씨'처럼 '타잔'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죠. 그 대신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이야기를 하겠죠. 이번 소설집에는 약삭빠르고 주도면밀한 사람들의 위선을 묘사한 작품이 많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식인이나 운동권 출신들은 옳은 말을 곧잘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매우 계산적일 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곤 합니다."

수록작 가운데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에는 캐나다로 이민간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식투자로 한몫 챙긴 남편과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이민을 떠났지만 아내의 눈에 비친 남편은 그곳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식탐 밖에 남지 않은 불평분자이다. 소설에서 아내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거듭 말하고, 남편의 돌연사를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결말부분에 이르러 아내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책에는 실업자로 살아가는 남자의 자기분열적 모습을 다룬 '산책하는 남자', 변절한 운동가인 애인과 부양해야 할 가족의 사채이자에 시달리던 여자가 태국으로 떠나는 이야기 '세라' 등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30-40대 소시민들의 탈출과 변신 욕구를 그린 8편의 소설이 실렸다.

작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보다 당대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면서 "소설의 시공간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많이 하는 젊은이들을 등장시켜 토론토, 시드니, 앙코르 와트 등을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8년 제1회 창비신인소설상에 중편 '비밀이 화원'이 입선돼 등단했고 4년전 첫 소설집 '루이뷔똥'을 발표했다.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 김씨는 "조봉암 등을 다룬 역사 장편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밝혔다. 320쪽. 9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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