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에 읽는 히틀러 -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13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13
니겔 로저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9월
품절


인류를 고통 속으로 내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를 쥐고 흔든 네 명의 정치가가 있었으니,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그리고 히틀러이다.

->전쟁은 영웅과 미치광이를 만들어내는것같네요.-.쪽

'하일 히틀러'라는 인사와 독특한 히틀러식 경례, 빨간 바탕에 검은색 십자갈고리가 새겨진 나치 기장과 함께 연상되는 히틀러라는 인물은 세계 최악의 독재자, 편집증적인 과대망상증 환자 등의 악명 높은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가 왜 그토록 유대인을 증오하고 끔찍해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의 반인륜적 행위는 더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분명 그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거기에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인격적인 열등감과 더불어 또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어떻게 한 개인이 한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지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괴벨스, 롬멜, 슈페어, 히믈러 등의 나치 우두머리들은 히틀러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 사실상 독일이라는 국가와 국민 생활의 모든 측면을 통제한 것은 히틀러 한 개인의 힘이었다. 그는 나아가 전세계까지 집어삼키려 들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여러 지도자들과 영웅들보다 물론 인격적으로는 한참 열등하지만, 그가 그들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제3제국'이라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그것을 위해 어리석을 정도로 물러날 줄 몰랐던 그의 놀라운 집착은 섬뜩함과 동시에 어떤 전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수 있는가 또한 몸소 체현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일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쪽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된 빈 시절

히틀러가 언제 병적이고 강박적인 반(反)유대주의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린츠를 떠난 후였음은 틀림없다. 린츠에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09년 히틀러는 아주 인기가 많은 빈의 시장이자 맹렬한 반유대주의자였던 칼 뤼거(Karl Lueger)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 히틀러는 분명 뤼거의 반유대주의 사상에 흠뻑 빠져 있었고, 또한 대중 언론의 지원을 받은 뤼거의 그리스도교 사회당이 반유대주의를 경멸한 황제에 대항해 대중을 조종하고 동원하는 방법에 주목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아버지가 충성스럽게 봉사했던 다민족 합스부르크 제국을 경멸했다. 대신에 그는 다른 많은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처럼, 1871년에야 통일되었지만 이제 어엿한 유럽의 지배 국가가 된 독일이 위대한 범독일 국가로 부활하기를 바랐다. 이 '대(大)독일'에 유대인을 위한 자리는 없을 터였다.
히틀러는 게오르크 폰 쇠너러(Georg von Schonerer)가 이끄는 범독일 민족주의자들의 반유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쇠너러의 가톨릭 교회 공격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그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쪽

"지도력의 기술은 민중의 관심을 단일의 적에 집중시켜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관심을 분열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는 사회민주당원들의 훌륭하게 조직된 대규모 시위운동(사상이 아닌)을 동경했고, 전(前)수사인 아돌프 란츠(Adolf Lanz)로부터는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다. 란츠의 쓰레기 잡지 《오스타라(Ostara)》는 흰 피부, 금발, 푸른 눈의 우수한 민족이 민주주의, 페미니즘, 검은 머리의 민족들을 쳐부수고 고대로부터 태양을 상징했던 스와스티카를 내세워 세계를 지배하리라 예언했다. 하지만 히틀러만큼 공적인 재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모든 불행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쪽

나치 정권의 가장 특이할 만한 점은 그 강박관념적인 인종차별주의였고, 그것은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 즉 600만 유대인들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아리아인만이 우수한 민족

나치의 중심적인 신념은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 즉 진정한 독일인을 위한 반(半)은 신비에 가까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었다. 여기서 '독일인'이란 시민권이나 거주지가 아닌 인종에 의한 정의였다. 하위인간(Untermenschen)으로 간주되는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이 아니라, '아리아인' 지배민족(Herrenvolk)에 속하는 이들만이 독일인이었다. 나치의 인종 이론은 유전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무엇으로 구성되었고, 아리아인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논쟁은 1935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발표된 '피의 법'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그 법은 유대인의 마지막 남은 권리까지 모두 빼앗고, 독일인과 유대계 독일인 간의 성관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접촉을 금했다. 부모 중에 한쪽이라도 유대인이면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라도 유대인으로 규정되었다. SS의 대장 히믈러는 골상학이나 코의 모양으로 인종을 분류하는 일에 열성을 다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쪽

독일의 문화적 탁월함을 가장 유감없이 보여 주는 음악 역시 나치화되었다. 유대인인 멘델스존의 음악은 금지되었고, 쇤베르크나 쿠르트 바일 같은 작곡가들은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전위적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비난을 받았다(둘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카라얀 같은 많은 저명한 음악가들은 나치를 지지하라는 유혹과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쪽

국민의 추앙을 받은 히틀러

1939년 4월 독일은 히틀러의 50번째 생일을 맞았다. 만약 그가 그때 죽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 이전의 어떠한 통치자도 독일인의 삶을 그토록 완벽하게 지배한 적이 없었다. 그의 초상화가 독일의 운명을 인도하는 근엄하고 자신만만하며 결연한 얼굴로 사방의 모든 벽에 걸렸으며, 군인, 정치가, 동물애호가, 심지어는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으로 100만 개의 포스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을 높이 쳐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독일식 인사'는 충실한 당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규범이 되어 있었다. 군은 오랫동안 이를 거부했지만 말이다. 많은 독일인들에게 히틀러는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초거성(超巨星)의 기운을 뿜는 존재였다.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사람들은 "총통께서 이 일을 아셨으면" 하고 한숨을 내쉬었고, 히틀러는 전쟁 때까지 이러한 흡인력을 잃지 않았다.
히틀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magnetische Kraft)', 즉 자신만의 카리스마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약간 둥글고 푸른 눈으로 꿰뚫는 듯 그윽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길고 결연하게 악수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율을 느꼈으며, 그를 의심하던 이들조차도 찬미자로 바뀌었다. "

->하지만 죽지않고 이제는 희대의 살인마가 되어 기억에 남게 되었다.-.쪽

유럽에 사는 850만명의 유대인 중 약 600만명이 나치에 의해 사살되었고, 생존자의 수는 나라에 따라 크게 달랐다.

->소름끼치는 숫자입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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