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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내가 좋아했던 만화는 주로 변신로봇이나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한편 순정만화는 유난히 시큰둥했는데 그것은 아마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빨간머리 앤>은 비디오로 예약녹화까지 해가면서 보고 또 봤던 기억이 새롭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앤 셜리. 주근깨 가득한 볼품없는 외모에 자신의 빨간머리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소녀. 그녀가 싫어하는 과목은 ‘기하'와 ‘요리'인데 ‘기하'는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고, ‘요리'는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188쪽) 얼핏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상상력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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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과 마음 속으로 기도하는 건 똑같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제가 저 나무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상상할거예요. 그러다 나무가 싫증나면 여기로 내려와 온화하게 고사리들을 흔들어 줄 거예요. 그리고 린드 아주머니의 정원으로 날아가서 꽃들을 춤추게 하고 클로버 풀밭을 한번 휩쓸고 지나간 다음, 반짝이는 호수로 가서 가볍게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으키겠어요. 아, 제가 바람이라면 상상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10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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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겐 한 가지 독특한 취미가 있는데 그것은 장소나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언제나 새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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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등장 하는 ‘초록 지붕집', ‘눈의 여왕', ‘빛나는 호수', ‘연인의 오솔길', ‘유령의 숲' 등과 같은 이름은 모두 그녀가 직접 지어낸 것들이다. 어디 나도 한번 상상해본다. 내가 살고 있는 장소에 번지수나 호수 말고 어떤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침실 밖으로 보이는 전봇대나 가로등에 과연 ‘눈의 여왕'과 같은 근사한 이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앤이라면 분명히 새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프린스에드워드 섬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삭막한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도 그녀는 분명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막힌 새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아무리 평범한 일상이라도 아름답게 재발견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범한 것들에는 무관심하고, 익숙한 것들에는 불친절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보단 곧잘 탈피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앤처럼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익숙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무료하게만 느껴졌던 우리네 일상이 신비롭게 느껴질지 모를 일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