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정일근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중)
 

적소의 밤은 깊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산초당에 계신 정약용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양 소식이 못내 궁금한 다산이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을 가지고 가는 길이다.

3월의 바람이 아직 차다. 조정에서는 남인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노론에서 연일 다산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이미 신유박해로 다산의 큰 형님인 정약종이 순교하였고 둘째 형님 정약전도 흑산도로 유배된 상태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나마 그 목숨마저 위태롭다. 밤남정에서 눈물로 헤어진 약전 형님은 잘 계신지, 아비 없이 혼인한 딸은 잘 사는지, 아버지 품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린 자식 생각에 다산은 가슴이 미어진다.

신해박해로 물설고 낯선 경상도 장기땅에서 돌아온 지 채 일 년이 안 되어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에게 더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 모진 고문으로 죽음 직전까지 간 다산은 강진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마음을 추스렸고, 아암선사를 만나 다시 손에 책을 잡을 수 있었다. 그 기쁨을 다산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둥그런 나물통은 스님 밥자리 따르고, 볼품없는 책상자 나그네 행장일세. 어느 곳 청산인들 거주하지 못할쏘냐. 한림원의 봄꿈이야 이미 아득하구나.”(‘題寶恩山房’중)

차와 책이 가까이 있으니 분노의 감정도 봄눈 녹듯 가라앉아 오히려 유배생활을 즐기기도 하나 보다. 다산초당이 있는 백련사로 접어드는데 저 멀리 강가에서 노 젓는 사공의 뱃노래가 애잔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다산이 어부가 되어 홀로 뱃전에 앉아 있다.

“한 조각 고깃배여/나 너와 함께 안개 낀 물결 속을 출몰하리./괘념 않으련다, 서강의 거친 물결이/흰머리를 재촉하더라도./손 쳐들어 푸른 옥패를 사양하고/머리 저어 황금 대궐엔 들지 않으리/단풍가지 끝 서걱대는 소리를 듣고/갈대꽃에 아침 이슬 맺히면/바람은 차서 뼛속까지 스며들리.//슬픈 피리 곡조에/빠르고 짧은 노래 부르면/저녁 썰물은 쏴르르/새벽 밀물 번들번들./큰 고기 잡아다/버들가지 꺾어 꿰어/막걸리 석 잔으로 지극한 바람을 수작하면/부들 돛 한 폭이 긴 그림자를 남기리./단잠 끝 새벽에 부스스 깨어나면/강에는 달이 잠겨 있으리.”(정약용 ‘어부’)

다산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시린 눈물이 뚝 떨어졌다. ‘스승님, 대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조양기 대감이 지금 스승님을 죽이려고......’. 그러나 말은 입에서만 맴돌 뿐 나오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화들짝 깨어보니 꿈이었구나.

새벽달이 꾸벅 졸다 이울고 있다. ‘다산선생은 무사하실까......’

창가에 선 채 소설 <정약용 살인사건>(랜덤하우스중앙.2006)을 붙잡고 노심초사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부디 살아계셔서 동백처럼 환하게 ‘실학의 꽃’을 피우셔야 할 텐데......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중)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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