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시골이라는 말은 고향가 거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나에게 시골맛이란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의미했다.-.쪽
벼를 길에 넓게 펴 말리는 이나 논에서 기계로 벼를 베는 이나 탈곡기로 벼를 터는 이나 일손들은 거의 중년의 아낙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어서 마음이 짠하다가도 간혹 청년이 눈에 띄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부정과 온갖 비리,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낭비와 사치, 그리고 속속들이 썩어문드러져 가는 부도덕에 거의 불감증이 돼버렸지만, 문득 이러고도 이 세상이 안 망하고 지탱해가는 걸 신기하게 여길 적이 있다. 그건 바로 저들 숨은 의인들 덕이 아니었을까? 나는 염치없게도 우리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 의인들이 의인으로 길이 남아 있길 바랐다. 그러나 의인하고 속죄양하곤 다르다. 누가 시켜서 되는 것도, 더군다나 개발에서 소외된 열등감으로 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자유 의사와 자존심 없는 의인을 생각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모두가 의인을 알아보고 공경하고 의인의 땀과 결실을 무릎 꿇어 귀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의인의 소멸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후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곳 농촌이, 실은 뒤진 게 아니라, 먼저 발전해버렸기 때문에 땅과 인심이 돈 맛밖에 모르게끔 천박하고 황폐해진 타 고장들이 장차 지향해야 할 미래의 농촌상이길 꿈꾸었다면 나는 너무 철없는 몽상가일까?-.쪽
다산과 초의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은 갖가지 아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스님의 설명으로 다산이 초의가 달인 차 맛이 생각날 때마다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넘어왔다는 험준한 산을 눈앞에 바라보는 감회는 각별했다. 어떻게 단지 차를 마시기 위해 저 높은 산을 넘을 수가 있었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산에게 산 넘어 또 산, 고개 넘어 또 고개를 넘게 한 게 어찌 차 맛뿐이었겠는가. 청아한 인품과 고담준론에 대한 갈증이 태산도 높은 줄 모르게 했으리라. 다산이 넘었다는 산 빛이 별안간 달라 보인 건 밝아진 햇빛 때문만이 아니었다. 뛰어난 영혼, 빛나는 영혼이 교감하고 머물다 간 자취 때문이었으리라.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기도 하지만 위대한 영혼 또한 자연의 정기가 되어 자연을 빛나게 한다. 정기가 없는 자연은 그냥 경치일 뿐이다. 경치는 아무리 좋은 경치라 해도 눈으로 보는 것으로 족하지 마음속으로 스며오진 않는다. 나는 다산이 넘었다는 크고 험한 산을 눈앞에 보는 것만으로 전율에 가까운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제 거친 산천이 그리도 유정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어찌 위대한 영혼뿐이랴. 이름 없이 살다 간 백성들의 한 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머무는 곳이 우리의 강산이다. 바로 그런 자연의 정기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심금을 흔들고, 고향 떠난 이를 죽어서도 뼛골이라도 묻히고 싶도록 끌어당기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닐까.-.쪽
버스도 더디고 봄날도 더뎠다. 황혼이 마냥 길게 꼬리를 끌고 도무지 깜깜해질 줄 몰랐다. 옆구리에 섬진강을 낀 길은 아마 밤새도록 그만큼밖에 안 어두워질 것 같았다. 멀리 가까이에서 벚꽃인지 배꽃인지 모를 흰 꽃들이 분분히 지고 있었다. 그런 희뿌염 때문에 하늘에 달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것도 없이 달밤이려니 했다. 달밤의 섬진강은 청승맞고도 개울물처럼 친근했다. 큰 강이 그렇게 사람살이와 거리감이라곤 없이 가까이 붙어서 흐르는 건 처음 보았다. 그래 그랬던가. 그쪽의 희뿌연 어둠 속엔 강 비린내와 함께 연기 냄새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자주자주 버스를 세우고 올라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땅거미 같기도 하고 저녁밥 짓는 연기 같기도 한 부드러운 어둠 속에 하체를 노곤하게 풀어놓은 마을의 집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옆구리에서 강이 떨어져나가자 본격적인 벚꽃길이 시작됐지만 섬진강 길만 못했다. 그 고장의 황혼이 그토록 길고 유정했던 것은 달빛 때문도 낙화 때문도 아니라 섬진강의 물빛, 모래빛 때문이었구나, 비로소 알 것 같았다.-.쪽
역시 섬진강변이었다. 푸른 들 푸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추수를 앞둔 논의 빛깔은 수시로 아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아름다웠다.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빛깔이 바로 저 빛깔이 아니었을까 싶게 그 빛깔은 단순한 심미안을 넘어 더할 나위 없이 깊은 평화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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