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인간을 갖고 노는 운명에 침을 뱉노라"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사내가 당나귀를 타고 이탈리아 동남부 해안마을에 들어선다. 사내는 15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나오는 길이며, 그 긴 세월 꿈꾸었던 애오라지 하나뿐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왔고 또한 죽기 위해 온 것이기도 하다. 사내의 이름은 루치아노 마스칼조네. 마을의 부랑아로 좀도둑질을 일삼다가 추방됐던 그는 인적이 끊긴 거리를 지나 곧바로 한 집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린다. 그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인이 문을 열어주고 그들은 침대로 향한다. 사내는 일을 마친 뒤 다시 당나귀를 타고 마을을 천천히 지나간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무리를 지어 뒤따르다가 돌팔매질을 시작한다. 사내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읊조린다.

“나, 루치아노 마스칼조네, 인간을 갖고 노는 운명에게 침을 뱉는다.”

사내가 감옥에서 오랫동안 연모했던 여인은 이미 죽었고, 그녀의 여동생을 여인으로 착각하여 동침했으며 그 노처녀는 사내가 뿌린 씨로 수태하여 사생아를 낳은 뒤 죽는다. 그 사생아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과 양부모의 성을 합쳐 만든 로코 스코르타 마스칼조네. “그렇게 해서 마스칼조네 일가가 탄생했다. 착각으로부터. 오해로부터. 씨를 뿌린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도둑놈’ 아버지와 남자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한 노처녀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 작가 로랑 고데(34)의 장편소설 ‘스코르타의 태양’(문학세계사)은 어처구니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시작된 스코르타가(家)의 4대에 걸친 이야기로, 2004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희곡작가로 출발한 경력 때문인지는 모르되 로랑 고데의 소설은 여느 프랑스 문학과는 달리 관념의 유희에 빠지지 않고 장쾌한 서사를 내세워 인간의 운명과 신, 그리고 생의 본질에 대한 자연주의적 천착을 과시하고 있다.

도둑의 사생아 로코는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는 유명한 강도가 되어 부를 축적한다. 로코는 그를 살려준 신부에게 “난 대재앙이에요, 대재앙. 지진이 나고 불길이 치솟고 가뭄이 들 때마다 하느님께 물어보세요. 도대체 왜 이러시느냐고. 난 염병 같은 존재예요, 신부님. 그뿐이라고요. 메뚜기 떼의 습격이나 지진이나 전염병이라고 보시면 된다니까요”라고 말한다. 신부가 살려낸 생명이 ‘재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로코는 죽기 직전에 다시 신부에게 와서 자신이 일군 부를 몽땅 마을에 기부하겠다고 말한 뒤 이렇게 선언한다.

“저 하늘엔 아무도 없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거요. 난 발이 다섯 개 달린 괴물이오. 하이에나의 눈에 살인자의 손을 지닌 괴물이라고. 내가 가는 곳마다 하느님은 뒤로 물러나 계셨소. 내가 나타날 때마다 자리를 피하시더라고. 당신네들도 나를 볼 때마다 아이들을 붙안고 집안으로 뛰어들었잖소. 하느님도 당신들과 똑같았소.”(68쪽)

흡사 희랍인 조르바의 한 대목을 보는 느낌이다. 로코도 조르바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그는 벙어리 여인과 결혼해 아들 도메니코와 주세페, 딸 카르멜라를 남겨놓았다. 이들 3남매와, 형제처럼 어울린 라파엘까지 합쳐 남은 이들이 몬테푸치오라는 마을에서 생을 이어가는 우여곡절이 이 소설의 나머지 골격을 이룬다. 라파엘과 카르멜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과 묻어둔 비밀들이 카르멜라의 고해 형식으로 군데군데 삽입된다. 가난한 자들의 신천지라는 뉴욕에 갔다가 그 땅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돌아온 이들은 몬테푸치오 마을에 최초의 담배가게를 열고,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갖은 삶의 악다구니를 견디며 스코르타가를 이어간다. 다 죽고 마지막 남은 스코르타가의 엘리아가 소설 종반에 이르러 신부에게 묻는다. “나라는 존재에 이르기 위해 다들 그렇게 고군분투한 걸까요? 내가 삼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도대체 왜들 그렇게 살려 아등바등했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신부의 대답이 이 소설의 고갱이다.

“올리브는 영원하다네. 열매 하나하나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말일세. 인간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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