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으로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1911-1993)의 장편소설 '첨탑'(삼우반)이 번역돼 나왔다.

'첨탑'은 1964년 발표한 골딩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중세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대성당의 주임신부 조슬린이 첨탑을 세우면서 벌어진 일들을 그렸다.

조슬린은 스스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주위의 반대와 재정적, 기술적 난관을 무릅쓰고 첨탑의 건설을 지휘한다.

대성당은 늪지에다 기초공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곳에 세워졌다. 그런 대성당 위에 또다시 첨탑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슬린 신부의 첨탑 건설과정은 이처럼 이성적ㆍ과학적 세계와 비이성적ㆍ종교적 세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진행된다.

작가는 이런 갈등 과정을 보여주면서 첨탑이 과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인간의 보편적 희망을 담은 상징적 건축물인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하는 한 야심가의 거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더구나 조슬린이 대성당의 주임신부에 오른 것은 첨탑 건설의 사명을 부여한 하느님의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국왕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의 이모가 장난스럽게 던져준 선물이었을 뿐이다. 이는 문맹인 아이보가 건축 자재를 제공한 대가로 대성당 참사에 오른 것처럼 부적절한 승진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추악하고 부조리한 현실모습을 제시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첨탑을 완성해가는 조슬린의 불꽃같은 생애를 통해 신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을 보여준다. 조슬린은 첨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은 누구이고 인간은 무엇인지 본질적 물음을 던진다.

나아가 소녀 구디를 성불구자 팽골과 결혼시킨 것은 조슬린 자신의 내면에 억압돼 있던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세우려 했던 첨탑은 구디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었음을 인식한다. 독자들은 여기에 이르러 이성적 세계와 비이성적 세계가 화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창용 옮김. 299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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