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 갔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床 위에서, 紙錢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 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권혁웅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상처를 안고 우물에 빠진 돼지는 돈(豚)만 밝혀 시(豕)시하고 해(亥)로운 세상을 저(猪)어하다, 삽겹살로 편육으로 수육으로 고삿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유홍준 시인이 사라진 돼지 족발의 흔적을 더듬어 <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2004)을 만지고 있다.
“갈고리에 꿰인 저 돼지는/네 개의 발을 중심으로 잘리어져 걸렸고/그대는 4부로 시집을 역었다/아아 저 네 토막 밖/머릿고기처럼/납작하고 납작하게 눌려져서라도/말하고 싶다 핏물이 스며나오는 책갈피/넘길 때마다 핏물이 묻어나오는 시집을 묶어/팔고 싶다 서점이 아닌 저 식육 코너에서 무표정하게 핏기 없이”(‘식육 코너 앞에서’)
끌려온 돼지는 날 선 칼에 의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무의미하게 해체되었다. 맛난 고기는 정육점으로, 부속은 해장국집으로 팔려갔다. 그러나 진국은 돼지의 멱을 딸 때 단말마의 비명을 간직한 머릿고기에 다 눌려져 있다.
“주검을 빨던 파리가/산 자의 음식 위에 날아와 앉는다//죽음 맛을 보라고,//송장 위에 앉았던 파리가/밥상 위에 날아와 앉는다//쫓아도,//쫓아도,//......//고기 삶는 여자, 喪主보다 더 많은 눈물 흘린다//무쇠솥 속의 살덩어리를 뒤집지 못해/뿌연 수증기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끙끙거린다.”(고기 삶는 여자‘)
파리와 돼지수육과 여자의 머리가 무쇠솥 속에서 한 그릇의 삼합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파리든 돼지든 여자든 욕망의 우물에 깊이 들어가려 생의 까치발을 들면 거기가 끝이다.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발자국이, 항문처럼/깊다//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그 남자의/괄약근을 핥는다//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해변의 발자국’)
집 나간 돼지의 발자국이 틀림없다. 지나온 삶의 무게가 얼마나 고단했으면 모래 위에 단단한 똥집을 남겼을까. 상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온 집으로 갈매기가 물고 온 부고 한 통.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별일 없냐/별일 없어요//행복이란 이런 것/죽음 곁에서/능청스러운 것/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어머니도 예수님도/귀머거리 시인도/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다. 마당 우물에 모두 제 발로 찾아와 자진해서 죽어주었으니, 날마다 수육에 소줏잔 기울이며 화투짝만 돌리면 장땡이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喪家에 모인 구두들’)
살진 돼지들이 건들건들 걸어와 우물의 깊이도 모른 채 몸을 던지는 집이 있다. 밤마다 돼지의 주검으로 만든 수육과 편육을 문상객에게 내 놓으며, 아직 갈 길이 더 있다는 듯 흐트러진 구두를 매만지는 시인의 구두 위로 족발자리 별이 꽃돼지처럼 활짝 웃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