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박해현기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홍콩 영화 감독 왕가위는 90년대 이후 한국 청년 문화 코드의 열쇠어다. 도시 한 복판에서 외롭지만, 고독이 감미로운 아시아의 젊은이들. 워낙 가부장제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동양 문화에서 일탈 욕구를 지향하기 때문에 고독을 즐기는 아시아의 청춘 군상. 사랑도 이별의 예감 속에서 미리 아파하지 않은 채 그 예감마저 즐기는 젊은이들이 하루키 소설과 왕가위 영화를 보면서 열광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와 왕가위를 합쳐 놓은 듯한 아시아의 소설가를 꼽으라면 대만의 왕원화(王文華·사진)를 꼽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이 영화로 만들 예정인 그의 소설 ‘단백질 소녀’는 지난 2002년 대만에서 출간돼 중국 대륙과 대만에서 40만 부 이상 팔렸다. 하루키 소설을 연상케하는 감각적이면서 청춘의 상실감을 꿰뚫는가 하면, 하루키에 비하면 더 세태 풍자적이면서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통속적 이야기 속에서 풀어놓는다. ‘단백질 소녀’의 주인공 ‘나’와 ‘장바오’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이 사라진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 그 낭만에 대해 냉소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낭만의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외모와 학력, 재력을 겸비한 여자들을 쫓아다닌다. 도시의 숲에서 그들은 사냥꾼이다. 사랑의 신화는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대만의 남자들은 ‘파리’ ‘상어’ ‘늑대’로 분류된다. ‘파리’는 엄마를 대신할 여자를 찾는 남자들이다. ‘상어’는 여자를 달콤하게 유혹해서 섹스를 즐긴 뒤 포만감을 만끽한 상어처럼 사라진다. ‘늑대’는 ‘영문 닉네임을 가지고 있고, 안경을 끼고, 영화배우처럼 차리고 다닌다’는 유복한 바람둥이들이다.

이런 남자들의 파트너가 되는 대만 여자들은 ‘냉장고’ ‘다리미’ ‘세탁기’로 나뉜다. ‘냉장고’는 ‘까무라칠 정도로 아름답지만, 감히 가까이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는 유형이다. 학벌도 좋은 그 여자들에게는 심각할 정도의 귀족 콤플렉스가 있다. ‘다리미’는 ‘금방 차가워졌다 금방 뜨거워졌다 해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판단을 내릴 방법이 없는’ 스타일이다. 이런 여자를 만나는 대부분 남자들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편 ‘세탁기’는 모든 남자들이 바라는 유형의 여자다. ‘당신은 세상의 온갖 더러움에 푹 절어 있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당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인가. 그러나 남자들이여, 속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옷이 너무 많아서 같이 엉키게 되면, 세탁기도 멈추어 설 것이다. 그때 당신이 두껑을 열면 제멋대로 뒤엉켜 버린 옷들은 온통 젖어있다’는 것이다. 그때 세탁기에서 벗어난 남자들은 ‘탈수기’같은 여자를 찾아가야 하는데, 어디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는가.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그래서 ‘단백질’과 같은 여자를 찾는다. 그들은 생을 걸고 기도한다. ‘하늘이시여, 사랑이 더 이상 미네랄처럼 차갑지 않기를. 콜레스테롤처럼 미끈거리지 않기를. 그녀를 영양실조에 걸린 내 생명으로 걸어 들어오게 하자.’고. 봄날에 새록새록 돋아나는 햇잎의 색채를 감상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가슴을 열고 경쾌하게 읽어갈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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