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소녀, 친구가 되다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2006 오즈북스
여기 오척 단구의 몸으로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아시아대륙까지 점령하려 했던 코르시카섬 출신 프랑스 황제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각에선 영웅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19세기 초반 그가 주도한 정복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탓에 그를 '무자비한 전쟁광'으로 격하시켜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백만 군대와 프랑스 국민의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던 제왕적 권력의 소유자였지만, 영광이 있으면 불명예가 있고 승리의 환호가 있다면 패배의 탄식도 있는 법.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영군군의 포로가 됐고, 이어 세인트헬레나섬에 갇힌다. 인생무상.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어느 누구도 감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 앞에 맹랑한 14살 소녀가 나타난다. 땅을 치며 울고싶은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섬에서다.

나폴레옹이 묵게 된 농부의 집. 그 집 딸 벳시 발콤은 바로 얼마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뿐이랴, 은근슬쩍 친구가 되려는 제스처까지 보인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다. 하지만, 왜일까? 나폴레옹은 그 소녀가 밉지 않다.

'황제와 시골 소녀가 나눈 특별한 우정'을 담아낸 스테이턴 래빈의 소설 <벳시와 황제>(오즈북스·박아람 역)가 번역·출간됐다.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결합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책은 2005년 뉴욕공공도서관 '십대를 위한 책', 미국서적상협회(ABA) 선정 청소년 우수도서 등으로 선정됐다.

아래는 둘의 첫 대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내가 만약 며칠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코앞에서 본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왜인지를 모르겠지만 황제를 여기서 마주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그러니까 아주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프랑스어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황제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두 발, 그리고 헤지고 낡은 잠옷에서 잠깐씩 시선이 멈추는 것 같았다….

변질된 오늘날의 우정을 반성케 해주는 황제와 소녀

황제와 시골 소녀의 첫 만남은 이처럼 어색한 그림이었지만, 머지않아 둘은 서로의 내면에 숨겨진 것들을 공유하며 허물없는 친구가 된다. 벳시는 변덕스럽고 독단적인 나폴레옹에게서 친절한 아저씨의 모습을 발견하고, 황제 역시 때묻지 않은 당당한 자세로 자신을 대하는 벳시가 아첨꾼 신하들보다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1821년 나폴레옹이 외롭게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친구'로 우정과 희망을 황제에게 선물한 벳시.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근엄한 황제가 아닌 '인간 나폴레옹'의 매력에 흠뻑 빠진 벳시는 유배지의 고통에서 그를 해방시킬 방법을 고심하다 결국엔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었을 '작전' 하나를 세우기도 했다. 그 작전이 뭐였냐고? 궁금증은 책이 모두 해소해줄 것이다.

진실된 우정과 사랑이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벳시와 황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평수와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차종을 잣대로 친구를 만나는 요새 아이들에게 약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덧붙여 정보 하나. 책은 곧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고, 나폴레옹 역은 <데블스 에드버킷>과 <베니스의 상인>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알 파치노가 맡는다고 한다. 여주인공 벳시 역에 누가 캐스팅될 지 점쳐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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