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개의 모놀로그
이영철 지음 / 청어 / 2005년 4월
품절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가을바다는 승복색깔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은 머리를 헤치고 달려들며 승복자락을 물어뜯었다. 아아, 저 바람소리. 천수경을 외우다가 목탁을 집어던지고 문득 떠나게 만들던 저 바람소리. 그러나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오지. 떠나봐야 아무 것도 없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고, 그것이 중생의 삶이며, 그리하여 중생은 각성케 되는 것이며, 부처와 가깝게 되는 것이지. 바람은 나를 미치게 하고 나를 타락케 하여 나를 파멸케 했다. 나를 파멸케 한 바람을 그러나 나는 사랑해. 파멸은 성취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르쳐주기 때문이지. 그리하여 나는 파멸을 사랑하는 것이지. 모두들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익히 알려진 방법, 단 한 번도 회의해 보지 않고 답습해 온 방법으로 부처를 만나려고 할 때, 새로운 방법으로 부처를 만나려는 자가 하나쯤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것이 비록 파멸이고 도로로 끝나게 된다 해도 뼈 빠지는 번뇌를 수반하지 않은 성취보다 백번 값진 것이기 때문이지. 감탄사처럼 찍혀있는 섬. -만다라쪽

사랑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희망 같은… 이제는 제게서 너무나 멀어져 버린 그런 단어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버려가는 과정일까요.-꿈쪽

한밤중이다. 나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뭔가를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해야 한다. 나는 지구의 핵심에 있는 것 같다. 지구 전체가 그 자체의 무게로 이 작은 상자를 누르고 있다. 상자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축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때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목소리가 쉬어서 안 나올 때까지, 죽을 때까지. 그런 심정은 글로 쓸 수 없다. 표현할 낱말이 없다. 완전한 절망. 오늘 하루 종일 이런 기분으로 지냈다. 느린 동작 속에 끝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나를 이곳에 처음 데려왔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계획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나는 그가 꿈꾸어온 소녀와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잘 알아보지 않고 사온 물건인 것이다. 그가 꿈꾸던 미란다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나를 계속 붙잡아놓고 있는 걸까? 아마 나는 그의 꿈속의 소녀가 되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콜렉터쪽

아마도 내가 사랑의 상실을 두려워 했나보지? 결국에는 잃어버릴 사람에게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야. 가까이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야. 가까이 오되 너무 가까이는 안돼요. 날 껴안아줘요. 하지만 너무 꽉은 안돼요. 당신의 쾌락을 즐기세요. 그 대신 나에게도 좀 돌려 줘야 해요. 그러곤 떠나세요. 불쌍한 남자들, 내 입술이 그들에게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당신하고 키스했다고 당신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고슴도치하고 자는 기분이 됐을 거야. -딸에게보내는편지쪽

우리의 모든 감추어진 비밀은, 바로 우리의 살가죽과 피와 뼈 속에 있는 것입니다. (침묵)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했죠, 아름답지 않아요? 그 푸르고 아름다운 나무는 우리들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 있습니다. 그는 여기 있습니다. 신은 당신입니다. 아니 당신의 신이십니다.-신의아그네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