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 빚는 여자
은미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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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지. 시인이 먹으면 시가 되고. 아니 시가 아니라 정신이 되지. 한데 당신은 무얼 먹고 무얼 만들지?"
-다시 나는 새쪽

"우리에게는 이제 설렘이 없어. 설렘을 줄 수 없는 상대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중략)

여자는 어제저녁에도 관성처럼 자신의 집을 찾아들어 온 남자와 애무가 궁색한 섹스를 했고, 안주 없는 술을 마셨고, 그리고 등을 돌린 채 잠을 잤다.

무미건조함 속에 그 모든 것들을 마쳤고, 잠 속조차 그저 암흑이었다. 의식의 텅 빈 공간. 그녀는 낮에도 잠 속을 헤맸다. 어쩌다 서로의 등이 닿으면 흠칫 벌레처럼 몸을 접으며 상대의 체온이 자신들의 의식 속에 입력되기를 거부했다.

아무런 감응도 안겨 주지 못하는 관계, 섹스조차 지리멸렬한.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전등처럼 그렇게 흔들리다 서둘러 끝내는 섹스에 여자는 늘 마침표를 찍고 싶었지만 놓아두고 보면 번번이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거나 물음표였다.

어찌된 일인지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해 놓은 마침표는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슬그머니 변형이 돼 버렸고, 여자는 알을 품듯 또 하나의 마침표를 가슴에 안고 지내야 했다.-다시 나는 새쪽

미례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하릴없이 다시 만두소를 끄집어 당겼다.
으깨진 채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갈색 빛깔의 소는 어딘지 불결해 보였다. 무말랭이, 양파, 양배추, 돼지고기, 갖은 야채……. 스무 가지가 넘는 재료들의 복합물.

그래, 얼마 전에 미례는 그 갈색 만두소에 아이도 집어넣었었다. 이름이 부여되기도 전에 어미의 자궁 속에서 조각조각 잘려 폐기물로 분류돼 버려진 아이.-만두 빚는 여자쪽

은숙은 왜 그때 조장의 풍습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죽으면 새가 먹기 좋게 시신에 칼집을 넣어 내놓는다는 조장의 의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원형극장 같은 둥그런 무대 위에 죽은 사람을 내놓으면 시꺼먼 새들, 하늘을 뱅뱅 돌다 어느 순간 무리 지어 내려와서는 상처 속에 뾰족한 부리를 집어넣고 살점을 뜯는다던가.

한때 세상 것들을 담아내던 눈알을 먹어 치우고, 욕심과 아집과 위선과 회오와 슬픔으로 가득 찬 심장을 쪼고, 생을 엮어 내던 온갖 것들의 기억이 저장돼 있을 뇌리를 파 먹고, 삶의 흔적이던 살과 근육을 말끔히 먹어 치우는 것으로 한때 그가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없앤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꾸었을 꿈과 희망도 세상에서 폐기 처분된 채 그들은 그렇게 사라져 갈 것이다.

한때 풍장을 꿈꾸었는데, 조장도 나쁠 게 없을 듯했다. 새의 배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일까. 새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바람을 알고, 허공을 가로질러 가서 종내는 피안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까.-새들은 어디로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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