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여성들,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
[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란 '운명의 여인' 혹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란 뜻입니다. 1912년 극작가 버나드 쇼(G. B. Shaw)가 처음 사용한 이래 오늘날,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나 예술적 경향 또는 그 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총칭처럼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예술 소재나 문화적 관심의 대상으로 유행한 시초는, 우리가 소위 세기말이라 부르는, 19세기말 상징주의를 비롯한 데카당(decadent, 퇴폐파) 문학과 미술입니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은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여인들과 관련된 일화 등을 소개한 책입니다. 팜므 파탈과 관계있는 거장의 그림들과 재미난 에피소드는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입니다. 저자의 해박한 미술사 지식과 그것에 바탕을 둔 심미안은 어느새 우리를 그림 속에 빠져들게 하고 신화의 나라로 여행하게 만듭니다.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크리스토파노 알로리-유디트의 눈빛과 현대의 팜므 파탈로 일컬어지는 그레타 가르보의 눈빛이 닮았다.
ⓒ2006 다빈치
보들레르는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갈망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신을 향한 것으로, 상승하려는 욕망이다. 다른 하나는 악마적인 것으로 하강하는 쾌감이며, 이것을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여겼다.

저자가 맺는 말에서 인용한 보들레르의 말입니다. 보들레르의 욕망은 곧 르네 지라르(Rene Girard, 프랑스의 문학평론가)가 주장한 '욕망'*과 흡사합니다. 흔히 '삼각형의 욕망'이라 불리는 지라르의 욕망은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그 대상을 욕망하게 한 타자가 숨어 있고 그래서 그 욕망은 매개된 욕망입니다.

상승의 욕망과 하강의 쾌감, 이율배반적인 이 상반된 욕망과 팜므 파탈이란 용어가 가지는 이중성은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치명적'이란 악마적 요소와 '매혹적 아름다움'이란 천사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팜므 파탈은 그래서 에로티시즘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에로티즘>의 저자 조르주 바타유(Bataille Georges)는 성욕과 살해욕, 고통과 쾌락, 사랑과 죽음. 이 지극히 상반된 두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련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위 책 11쪽)

저자는 이 책에서 대상을 그린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주로 회화)을 통해 팜므 파탈의 다양한 면모들을 소개합니다.

저자의 눈길은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 '도대체 그것이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 당혹해 하는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그림 감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성녀와 창녀, 사랑과 죽음, 신화의 세계와 그것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현대의 그림 등 팜므 파탈의 이원적 대립구도는 충돌의 미학이 아니라 융합의 마법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팜므 파탈 개념 등장

보들레르는 사랑을 가학자와 피학자가 벌이는 악마적인 게임으로 보았습니다. 팜므 파탈이 유행하기 이전까지는 욕망의 지배자로서의 남성과 성의 희생자로서의 여성이란 관념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가학과 피학의 일반적인 구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적인 성 가치관이 무너지고 자의식에 눈을 뜬 신여성들이 목청을 높이며 동등한 성의 해방을 부르짖자 남성들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잔인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 두려움과 경계심 속에서도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 유혹을 이제 남성들은 견디어내거나 비참한 쾌락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보들레르가 말한 '악마적'이란 '무섭고 흉측한 괴물과도 같은'이 아니라 (골드만의 표현처럼) '문제적'이라 해석해야 합니다. 곧 상승의 욕망과 하강의 쾌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도모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숙명적인 모습이라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가학과 피학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불행을 저자는 팜므 파탈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남성의 단순한 성적 호기심에 기댄 팜므 파탈의 광고적 이미지를 뛰어넘습니다. 애욕과 사랑의 경계를 굳이 염두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는 팜므 파탈의 대상으로 신화와 성서의 여인들, 나아가서는 실재의 인물에게까지 눈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을 '잔혹'(살로메, 메두사), '신비'(이브, 롤리타), '음탕'(마릴린 먼로, 옴팔레), '매혹'(헬레네, 프리네)의 4편으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상 인물들과 관련하여 소개되는 미술작품과 미술가들은 셀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팜므 파탈을 세세하게 구분하자면 신화나 성서 속의 여인들과 실재의 인물들로 다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테네 여신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정사를 벌임으로써 미움을 사 괴물로 변하는 벌을 받고 페르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메두사, 혼전정사를 마음껏 누리다 지참금 갖고 시집가는 여성해방 천국 라디아 왕국의 여왕으로서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린 옴팔레(사람의 배꼽, 나아가 대지의 중심 세계의 근원을 의미) 등이 바로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질투에 눈이 먼 어머니를 위해 세례 요한을 죽인 살로메, 정사를 벌인 후 그 남자를 죽인 복수의 화신 유디트, 이브와 유대 신화에 나오는 이브 이전의 여자 릴리트, 삼손을 죽인 팔레스티나의 여인 들릴라(데릴라), 다윗왕을 성의 노리개로 만든 뒤 그 부정을 감추기 위해 충신들을 죽게 만든 밧세바 등은 성서의 인물들입니다.

▲ 기타 레슨/발튀스-동성애와 미소녀를 향한 성적 욕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2006 다빈치
또한 12살 소녀와 중년남자의 광적인 사랑을 그린 소설 <롤리타>의 주인공 롤리타, 집시의 피를 가진 여인과 그녀를 향한 맹목적 사랑에 눈이 먼 돈 호세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소설의 주인공 카르멘, 19세기 산업사회의 창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에밀 졸라의 나나 등의 이야기는 소설 속 팜므 파탈이고요.

20세기 최고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끝내 정복하지 못했던 당찬 여인 조세핀, 인류의 지성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인마로 부렸던 전설의 헤타이라(고급 창녀) 필리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여 서게 된 재판정에서 자신의 누드를 보임으로써 무죄를 선고받아 '아름다운 것은 곧 무죄'라는 광고 문구를 온몸으로 증명한 전설적인 창녀 프리네 등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팜므 파탈들입니다.

저자 이명옥은 현재 사비나 미술관 관장이며 국민대 미술학부 겸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우리 동네 마실터 같은 대중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참신한 기획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갤러리 이야기> <날씨로 보는 명화> <에로틱 갤러리> 등은 그녀의 노력이 엿보이는 저서들입니다. 저자는 <팜므 파탈…>이란 책을 통해 단순히 요부라는 의미를 넘어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며 스스로를 가꾸고 사랑할 줄 아는 여성상과 팜므 파탈의 마력에 빨려들 수밖에 없는 남성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고듭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팜므 파탈이란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왜 대중을 열광하게 하고 현대 상업광고의 중요한 이미지로서 기능하는지, 그 의문에 해답을 줍니다. 팜므 파탈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배꼽(옴팔레)'같은 책이지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사랑과 성교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여자가 생각해낸 것 중 가장 세련되고 유혹적인 장식"이란 문장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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