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 통해 엿보는 다양한 '인간군상'
[오마이뉴스 정아은 기자] 장편소설이 한 작가의 내면을 속속들이 파고 들어가는 깊은 거울이라면 단편소설은 작가의 단면을 조금씩 드러내 보여주는 맛깔스러운 삽화와도 같다. 한 작가가 여러 시기에 발표했던 단편들을 골라 묶은 단편집은 작가의 의식이 미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여러 가지 사회 현상에 대해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

 
▲ 은미희, 만두 빚는 여자
ⓒ2006 이룸
60년생인 작가 은미희의 작품집 <만두 빚는 여자>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잘한 일상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 일상들이 머금은 쓸쓸함, 사회적 기제, 개인적 실존을 조근조근한 언어로 속삭이고 있다.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은, 다소 평이한 문체의 작품들의 문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혼자 사는 중년의 여성, 만두를 팔며 쓸쓸하게 인생을 지탱해가는 만두가게 주인, 장애인, 북한 출신 노인 등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이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중년,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은미희의 작품은 굉장히 사실적이다.

...수박 접시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앉아 있는 둘 사이에 무거운 기류가 파고들었다. 법의 보호 장치를 차입해 오는 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는 결혼한 여자와 제도 자체를 거부하며 관계 사이에서 유랑 같은 삶을 거듭하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사이에서 드리워져 있는 알력, 갈등, 길항들이 서로를 서름하게 만들었다. 결혼한 여자답게 수컷의 냄새를 직감으로 알아차린 혜경의 태도에 은숙은 적이 당황했다. -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결혼하지 않은 중년여성 은숙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하게 되는 혜경이 서로의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 장면이다. 중년이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환상이나, 환상에 기반을 둔 애정을 가질 수 없는 쓸쓸한 시기인 것일까. 결혼한 여성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미혼인 여성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회적 모순을 중년여성의 일상의 쓸쓸함으로 담아내는 작가의 솜씨가 노련하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단지 여성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 <편린, 그 무늬들>이나 <새벽이 온다>에서 등장하는 남성화자들은 가장으로서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과도한 책임감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과음하는 것으로 도피하곤 하는 무기력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정과 사회 양쪽에서 책임의 한가운데 서있는 중년 여성과 남성들에게 가해지는 관습의 무게가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 마음 한켠이 묵직해진다.

일상의 관계에 내재해 있는 폭력성에 관한 고찰

'어쩌다 그가 생을 버렸는지 알 수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일상에서 우리가 영위해가는 관계에 얼마나 많은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빼어난 수작이다.

어느 날 '종수'라는 옛 친구가 화자에게 찾아온다. 종수는 부잣집 아들로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고 살며 친구들에게 흔쾌히 자신의 부를 나누어주었던 친구이다. 가난했던 친구들은 종수의 부를 당연한 듯 나누어 가지면서도 늘 '가진 자'의 부조리를 비판했고, 종수는 그들의 비판을 달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그들의 물주가 되어주곤 했다. 결국 친구들의 농간에 의해 알거지가 된 종수는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친구들의 야비함에 화자는 치를 떨게 된다.

어느 날 전해들은 종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가는 화자.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종수의 진짜 죽음. 이 단편을 읽으면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과 건조한 문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극적인 반전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양한 계층의 약자에게 보내는 관심

<나의 살던 고향은>은 이산가족 상봉 대열에 끼지 못한 북한 출신 노부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지를 주워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가난한 할아버지는 십 년 전 같은 북한 출신 할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양쪽 다 북한에 배우자와 자식을 두고 온 처지라 늘 마음은 그 곳에 가 있다. 파지를 모아서 판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금해서 고향에 두고 온 처에게 줄 금반지를 마련하는 것을 생의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할아버지. 이에 서운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는 하면서도 그는 그 습관을, 북에 있는 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차마 접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앓아눕게 되자, 자신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되는데….

작가의 시선은 북출신의 노인, TV에 나오는 이산가족 상봉 대열에조차 끼지 못하는 이중소외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노인들의 삶까지 훑고 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쓸쓸한 노년의 삶. 서로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하고 함께 살지만, 서로의 마음에 내재해있는 북쪽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일상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단편은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재치 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게 된다. 타인들의 자잘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데에서, 그 쓸쓸한 내음을 맡는 데에서 내 삶에 대한 의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는 것은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역설적인 묘미. 작가는 쓸쓸한 일상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통해 삶이 숭고한 것임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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