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 도대체 너는 누구냐?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영화 ‘아이덴티티’(2003.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진짜 공포는 모든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 온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지각 하는 순간 삶은 또 다른 공포로 돌변한다. 영화가 조명하는 주요 사건은 모텔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이지만 플룻의 이중구조 속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다중인격 살인자가 있다.

자신 안에 여러 인격이 있다고 믿는 복잡한 인물은 배수아(41)의 소설집 <훌>(문학동네. 2006)에도 등장한다.

표제작 ‘훌’은 인명을 지칭한다. 특이한 점은 훌이라는 인물이 ‘친구 훌’과 ‘동료 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TV프로그램 ‘미인에게 청혼하다’ 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둘러싼 문제들은 서로 다른 기호와 취향 때문에 일어난다. 작가는 훌이 사는 곳과 시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호와 취향이지 주소와 시간이 아니다.

“친구 훌은 연속극 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침대 발치에 누워 연속극이 진행되는 사이에 가판대에서 사가지고 온 신문을 읽었다. 그러나 동료 훌은 그의 그런 면까지는 자세히 모르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본문 중)

‘친구 훌’은 연속극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 ‘동료 훌’은 연속극을 좋아하고 외출을 좋아한다. 작가가 훌이라는 존재를 친구와 동료로 나눈 이유는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두 사람에게 화자 ‘훌’의 내면과 외면을 각각 대입시키기 위해서다. 묘하게 엉켜 있는 인물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훌이 바라보는 타자가 결국 자신의 다중적인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이름, 주거지, 소속, 시간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배수아는 반대 지점에서 그것을 파괴하려 달려든다. 시공간을 명확히 정의내리지 않고, 어느 한 나라의 언어가 아닌 전 세계의 언어 ‘에스페란토어’를 등장시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작가는 화자 훌이 친구인가 동료인가의 문제보다 나와 다른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에 주목한다. 단편 `훌`은 연속극, 외출, 음식, 악수 등 삶의 파편들을 대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등단한지 13년째지만, 배수아식 문체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범국민적 작가가 되기보다는 열성팬들의 환호를 즐기는 컬트적 성향이 만들어낸 7편의 단편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김미정 문학평론가는 “이들은 당연히 전체의 상을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고정된 하나의 정체성이나 동일성으로 귀결하지도 않는다. 공간을 택하고 여행을 통해 기존의 정체성을 지웠으므로 당연히 다시 동일성과 정체성을 가진 ‘나’들이란 어불성설일 터. 따라서 우리는 소설 속의 어떤 틈새와 중첩들을 살펴야 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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