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가 말하는 `밥보다 좋은 책읽기`

"남편과 나는 드디어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티셔츠도 바꾸어 입고 여차하면 서로의 양말을 갖다 신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책들은 계속 별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이까지 하나 낳은 뒤에야, 조지와 나는 마침내 우리가 장서 합병이라는 좀 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을 이룰 준비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중략)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주말 무렵, 겹치는 책을 정리해서 누구 것을 간직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을 때 찾아왔다. 나는 우리 둘 다 `혹시나` 갈라설 때를 대비해서 정말 아끼는 책들은 여분으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정리가 끝났다.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숨을 헐떡이며 앉아, 땀 범벅이 된 몸으로 입을 맞추었다." (본문중)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갈등장소의 배경으로 종종 멋진 서재가 등장한다. 고급 장서들로 책장을 빼곡히 매운 그 공간에 앉아 서재의 주인은 책을 보고, 심적 갈등을 일으키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을 보여준다. 장서 목록만 보아도 주인의 성격과 취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개인서재는 예로부터 배우자도 인정하는 집안 유일의 사적인 공간이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지호, 2001)는 우선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그러나 표제만 보고 `이색적인 결혼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책을 펼치기도 전 독자는 출판사가 파놓은 함정에 너무도 쉽게 `폭`하고 빠지는 것이다. 말괄량이 `처제 결혼 시키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라틴어 `Ex Libris`로 `장서표`라는 뜻이다. 한국판 제목인 <서재 결혼 시키기>는 아마도 첫 장인 `책의 결혼`에서 따온 듯 하다. 결혼의 준비 과정이 그러하듯, 앤 패디먼 역시 남편과 서재를 합치는 과정은 쉽지않은 여정이다. 분류 방법이라든지 장서 보관법등 여러면에서 남편과 대립하며 처음으로 이혼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확실한 한가지 사실은 책을 시집 보내는 데 혼수품은 필요없다. 말 그대로 두 서재가 하나로 합쳐질 뿐이다.

"모든 것은 책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표제가 말하듯 이 책은,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장이자 애서가인 앤 패디먼이 들려주는 `행복한 책읽기`에 관한 기발하고 자전적인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 책은 글 쓰는 직업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저자가 어린시절, 책으로 도미노를 쌓으며 자연스럽게 책의 세계에 입문한 과정을 비롯하여 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세련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책의 도입부부터 시작되는 갖가지 책에 대한 비유는 범상치 않은 책벌레로서, 그녀의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남자친구의 기준을 토머스 하디의 주인공으로 정하고, 세익스피어를 옆집 아저씨처럼 대하면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 앞에서는 `소싯적에 책 좀 읽었네`하던 독자들 역시 어느새 무릎을 꿇게 만든다.

그러나 제목마저 생소한 수많은 책의 향연에 질려 이내 책을 덮어 버린다면 독자는 잃어버린 책의 도시로 향하는 보물지도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힘겨운 도입부를 지나고 나면 곧, 유쾌하게 변신한 앤 패디먼의 안내를 받으며 책에 관한 저자의 재미나고 독특한 에피소드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고 만다.

"내 친구 클라크는 해가 질 때까지 부인이 블라인드도 올리지 못하게 한다. 장정의 색이 바랜다는 것이다. 그는 아끼는 책은 적어도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책장을 넘기는 고통을 면하게 해 준다. 그 집에 놀러 온 장모가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혹시나 그 책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짓 - 예를 들어 책을 탁자에 엎어 둔다든가 - 을 할까봐 뒤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p71)

앤 패디먼식의 쫄깃하고 유쾌한 수사법은 애서가의 기벽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독자들을 한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사로잡는다. 결혼 5년만에야 비로소 영적인 결합을 이룬 책벌레 부부를 비롯 너덜너덜한 책도 버리지 않고 비닐팩에 보관하는 오빠 이야기, 실명 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아버지의 책 사랑법과 소설의 배경을 찾아 직접 여행을 떠나는 저자의 현장독서 이야기 등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특히 문학책을 껌처럼 찢어 삼키는 저자의 어린 아들과 읽을 거리가 없을 땐 전화번호부나 통신판매 책자라도 집어드는 저자의 병적(?)인 습관 그리고 레스토랑에 앉아 온 가족이 메뉴판의 오타를 잡아내는 광경은 묘한 공감마저 불러 일으키며 폭소를 자아낸다.

이 책은 저자가 <시빌리제이션>지에 `평범한 독자의 고백`이라는 코너에 연재하던 고정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하지만, 마냥 웃고 넘기기에는 확실히 묵직한 무게가 목에 걸린다. 지난 날, 책읽기에 열중하던 우리네 평범한 독자들은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지난 3일,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한국의 가구당 월 평균 책값 지출이 1만4백원 가량이라는 보도자료는 그간 `독서인구의 감소`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학교마다 도서관이 부족하던 시절, 교실에 비치된 학급문고는 어린이들에게 유용한 지적 자산이었다. 등하교길에도, 식탁머리에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학급문고를 주름잡던 이른바 `책 벌레`는 반마다 한 둘씩은 꼭 있기 마련이었는데, 이들은 부직포 게시판의 책나무를 사과 스티커로 나날이 풍성하게 채우며 무언의 서열을 다투곤 했다.

출판사 마다 매일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연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게임과 놀이감을 추월하기엔 확실히 역부족이다.

"새로 책을 찾아 나서는 길은 언제나 인도 제도로 항해하는 것이며, 묻힌 보물을 찾아나서는 것이며, 무지개의 끝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 끝에 금이 든 단지가 있든 그저 즐거운 책 한 권이 있든,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늘 경이가 넘친다."(p202)

한국과 미국이라는 배경은 다르지만, 그 옛날 헌책방의 먼지를 털어가며 고서를 찾아다니던 아련한 기억과 졸린 눈을 비비며 이불 속에서 밤새워 읽어 내려간 재미난 소설책의 감동 그리고 노을이 지는 줄도 모르고 문학책에 빠져들었던 그 시절, 책 읽는 기쁨만큼은 국경이 없음을 앤 패디먼은 책을 통해 잘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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