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추리소설의 결정체
[오마이뉴스 정아은 기자] 세월을 따라 나이를 먹으면서 한 가지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의 핵심에는 결국 개개인의 인간이 있다는 것. 커다란 사업의 영업도, 한 나라 영수의 통치행위도, 작게는 한 가정의 자잘한 대소사도 결국 개개 인간의 품성과 특성이 그 당락을 좌우한다.

옷 한 벌을 만들어 팔 때에도 영업의 성공가능성은 기술 자체에 있기 보다는 그 옷을 파는 영업사원의 눈빛과 품성, 사고방식,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 물품은 인간이 편하기 위해 마련한 도구에 불과한 것, 결국 핵심은 인간 개개인인 것이다.

 
퍼트리샤 콘웰 신작, 카인의 딸 1권 표지.
ⓒ2006 노블하우스
퍼트리샤 콘웰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가 그려내는 최첨단 법의학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대량의 독자군을 형성하게 된 것은 그녀의 소설 속에 나오는 고도의 법의학 지식 때문도 아니고 고도의 추리 소설적 기교 때문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품고 가는 한 개인, 케이 스카페타라는 여성 법의관이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잘한 특성과 매력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내가 변함없이 분명하게 나만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이 집 복도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웨슬리는 대형 사건이나 특이한 사건들을 조사하느라 이곳저곳 다니지 않을 때면 나와 함께 지냈다. 늘 내 중심으로 사고하고 내 것을 챙기는 성향 때문에 웨슬리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했다. 나는 중년의 나이를 넘겼고, 가족이든 연인이든 내 숨입을 법적으로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케이는 첫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 살아가는 법의관이다. 주로 살인현장에서 시체를 부검하여 살인의 동기를 추적하는 역할을 하는 케이는 시체의 살점을 직접 떼어내어 뼈를 검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뼈를 끓는 물에 삶아 남은 물질을 분석하기도 한다. 거친 현장에서 일하며 악랄한 범인들과 고도의 두뇌싸움을 하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범인을 죽이는 사태에 처하기도 하면서 케이의 성격은 냉정하고 개인적인 쪽으로 변해간다. 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잔인하고 지능적인 살인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케이는 주위 사람들-연인, 친구, 직장동료, 조카 루시-과의 갈등관계를 자꾸만 반추해보곤 한다.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그리고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만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 대화. 갈등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친지이면서 동시에 함께 일하는 동료이기도 한 루시와 함께 연쇄살인 사건의 현장 사이를 드나들던 케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충격적인 이별을 맞게 된다.

케이가 맞은 이별은 주위 모든 이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로 남는다. 인간이기에, 그리고 특수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기에 겪게 되는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자신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되는 케이. 그런 케이에게 내미는 주위 사람들의 손길. 케이는 그렇게 상처를 받고,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차에서 먼저 내린 나는 진입로에 서서 마리노를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서 커다랗고 지친 몸뚱이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연민이 느껴졌다. 마리노는 혼자이고, 틀림없이 사는 게 지옥 같을 것이다.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도 많지 않으리라. 직업 때문에 할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 하고 그 외에도 인간관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변치 않은 건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대개는 친절했지만, 항상 따뜻하게 대해준 것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동료인 마리노 형사를 바라보는 케이의 눈길. 그녀가 동료에게 보내는 이 연민어린 시선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독자는 이 장면을 통해 케이와 그녀의 동료 형사, 그리고 인생이라는 험한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 곳곳에서 사회 전반에 대한 콘웰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대량학살로 목숨을 잃은 인디언들의 뼈를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베시 박사가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을 대하는 독자는 별안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에 대해 반추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디언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추리소설이 얼마나 될까. 콘웰이라는 작가의 역량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 박물관은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는 녹색 나무 서랍들 안에 3만여 개의 사람 뼈가 보관돼 있는 거대한 화강암 창고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 뼈들은 미국 원주민들, 정확히 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을 연구하는데 사용되는 귀중한 수집품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그것들을 그들의 후손에게 돌려주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 법안이 통과되자 베시는 의회에서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가 일생 동안 연구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 실려 나가 이제는 문명의 때를 입은 서부로 돌아가게 된 셈이니 말이다

<카인의 딸>은 기존의 스카페타 시리즈가 가졌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같은 등장인물이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를 해결해가는 방식도 기존의 시리즈와 너무나 유사하다. 시신을 분석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적나라해지고 잔인해졌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겠다. 혹시 기존의 것과 조금 다른 추리적 기법이나 충격적인 새로운 패턴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굳이 읽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 스카페타 박사의 인간적인 면모, 한 사람으로서 힘든 일을 겪고 아파하고 그를 극복하고 다시 시지푸스처럼 일상을 살아내는 끈질긴 모습을 따라다니던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의 케이 스카페타를 만나게 될 것이므로. 감정이입이 강한 독자라면 후반부의 어느 한순간, 눈물이 폭포수처럼 솟아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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