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디스토피아, 그리고 아이들의 일그러진 영웅
[조선일보 김태훈 기자]
 
  
‘얼굴없는 소설가’ 듀나(Djuna)가 네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태평양 횡단특급’을 낸 지 3년여 만이고 첫 소설집인 ‘나비전쟁’(1997) 이후로는 9년 만이다. 네 권의 소설집이 나오는 사이, 그(혹은 ‘그녀’)는 사이버 공간을 점령했고, 이어 오프라인에서도 만만찮은 인기를 과시하는 대표적 SF 문학 작가로 자리잡았다.

전보다 유명해졌고(영화평론 분야에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도 강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장막 밖으로 나오길 거부했다. 이메일로 이유를 물었더니 “익명성이 편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소설상 수상자가 되면 상금 받으러 나오겠느냐”고 다시 묻자 “온라인으로 송금받겠다”고 했다.

이번 소설집은 ‘대리전’을 비롯해 ‘토끼굴’ ‘어른들이 왔다’ ‘술래잡기’ 등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리전’은 부천이라는 실제공간을 무대 삼아 벌이는 우주인과 지구인의 전쟁 이야기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외계인의 지구 유람을 안내하는 관광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독특한 것은 외계인들의 여행 방법. 지구는 너무 멀어 우주선을 탔다가는 도착하기도 전에 늙어 죽는다.

외계인들은 인터넷망과 흡사한 엔시블이란 네트워크를 이용해 자신의 정신을 인간의 몸 속에 전송하는 방식, 즉 인간의 뇌를 숙주삼아 기생충처럼 여행하는 방법을 고안한다. 그렇다면 너무 멀어 방문하기도 힘든 행성과 어떻게 전쟁을 벌인다는 걸까.

듀나는 ‘우주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침공한다’는 SF 고전들의 상투적인 가정을 버리고 지금까지의 SF들과는 다른 괴상한 전투 풍경을 만들어냈다. 비행접시는 커녕 광선총 한 자루도 가져오지 못하고 오직 네트워크를 통해 정신만을 전송할 수 있는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해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대리전을 택한다. 그런데 그 대리전의 풍경이 아주 고약하다.



배가 나온 아저씨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장난감 권총이나 손전등 총으로 싸워댄다. 영락없는 애들 전쟁놀이. 그것이 우주전쟁이란 걸 모르는 이의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볼썽사나운 광경인가. 듀나는 이처럼 어이없고 코믹한 풍경의 우주전쟁을 그려냄으로써 전쟁을 조롱하고 그런 전쟁이나 일으켜 대는 현실세계의 한심한 어른들 또한 절묘하게 비웃어 버린다.

함께 수록된 나머지 세 편에서도 어른과 그들의 세상에 대한 조롱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을 적대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동경한다는 점에서 윌리엄 골딩이 ‘파리대왕’에서 그린 어린이 유토피아의 궁극적인 실패, 우울한 디스토피아(distopia)적 세계관과 맞물린다.

작가는 또한 화자로 하여금 실체가 없이 오직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외계인에 대해 끝없이 존재의 진위를 의심하게 한다. 실체는 없고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사이버공간)는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교하게 조작된 거짓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따라서 듀나의 소설을 읽을 때는 ‘그그그카탕모그무인’ ‘퐁야퐁야’ 등 그가 말장난을 위해 만들어낸 단어들에 키득대며 재미있어 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벼운 문체와 언어의 유희 속에 숨겨둔 현실 비판과 풍자까지도 함께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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