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퇴임 지배인들은 누가 보아도 밝고 쾌활한 표정들이었는데, 그런 것이 늘 환영받는 파리가 아닌 시골에서였다면 다소 어색하게 보였을 정도였다. 아마 실제 파리에 사는 사람 중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즐거운 표정으로 감추거나, 자기만의 흥겨운 감정을 슬픔, 고뇌, 무관심등을 가장한 '가짜 얼굴'로 그럴듯하게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파리지엥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자고로 파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늘 무도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49쪽
해골 머리에 깃털 모자, 진홍빛 의상의 그 남자는 길다란 빌로드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붉은 화염 같은 그 색조가 바닥을 근사하게 물들이는 듯했다. 그 망토자락을 자세히 보니 금실로 무슨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고, 그것을 알아본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읽어보는 것이었다. '.....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나는 지나가다 들른 <붉은 죽음>이외다!.....' 문득 누군가 호기심 어린 손길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해골 분장의 자줏빛 옷소매로부터 뼈만 앙상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 경망스런 자의 손목을 와락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는 <죽음>의 막강한 완력을 손목뼈마디까지 느끼게 된 희생자는 그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157쪽
자 이걸 가져요... 당신을 위해 지니고 다녀요...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도... 이건 내가 주는 결혼 선물입니다... 가엾고 불행한 이 에릭이 주는 결혼 선물... 당신이 그 젊은이를 사랑하는 거 다 알아요... 아, 더는 울지 말아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 그래, 나는 설명해주었지... 그녀도 금세 이해하더라구... 내가 그녀에게는 죽을 준비가 된 가련한 한마리의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언제든 원할 때 그 젊은이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녀는 나와 더불어 울어주었으니까... 아! 다로가... 생각해봐... 그녀에게 그렇게 설명을 해주면서 나는 마치 내 심장을 정확히 네 조각으로 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더불어 울어주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지... '가엾은 에릭'이라고.....-420쪽
가엾고, 불행한 에릭! 그를 동정해야 할까, 증오해야 할까? 그가 원한 건 오로지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것, 그 하나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흉측한 몰골....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아예 감추거나, 그것을 가지고 못된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평범한 얼굴이었다면 가장 고귀한 인간 중 하나로서 추앙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 세상 전부로 채워도 남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지하의 어두컴컴한 밀실에 만족해야만 했던 그.... 그렇다, 우리는 오페라의 유령에게 증오나 저주가 아닌 동정과 사랑을 돌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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