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7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어무님, 제가 어찌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모르겠습니까. 두 자식사이에서 차마 못 당할 고초시지요. 자식으로만 친다면 저희 두 놈이 모두 천하에 불효자식들입니다. 핏줄이 먼저지 사상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 옳습니다. 어무님 생각을 제가 어찌 감히 원시혈연주의니 원시감상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제 어무님이 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가 아닌가를 어찌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다행이도 아들이 하나지 둘이 아니로군요. 그어머니에게 우리처럼 딴 생각을 가진 아들이 둘이었다면 그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군요. -20쪽

그래, 누가 더 옳은지는 세월이 지나가봐야 알 일이고, 지금은 서로 총을 맞댄 어지러운 세상이다. 사람이 권세를 지녔을 적에 그것을 여러 사람을 위해 쓰면 겸손해지고, 자기를 위해 쓰면 교만해지는 법이니라. 실인심하지 않도록 하거라.-46쪽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한다고?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추접하고 비열하지 않으면, 청결하고 품위있는 전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전쟁이 도대체 뭔가? 일단 일어났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무찔러 이기는 게 그 목적 아닌가? 목적이 그런데 추접하지 않고, 비열하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악독하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겠나. 전쟁에 이긴 쪽일수록 그만큼 추접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악독한 짓 많이 했다는 거 아니겠나. 다만 인간이 교활함으로 그런 추악한 것들을 승리라는 포장지로 싸서 은폐시키고, 또 반대로 미화시키고 하는 거 아닌가. -69쪽

욕심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어두워진 마음의 눈은 헤어날 길 없는 고통의 수렁을 만드는 법이었다.-92쪽

"알겄소, 투전판이야 자리럴 털고 일어나야 누가 땄는지 아는 법이고, 쌈이야 끝나봐야 누가 이겼는지 아는 법잉께, 깨끔허니 이겨갖고와서 큰소리럴 쳐도 치든지, 여맹에 가입허라고 권해도 권허든지 허씨요. 그때넌 여맹에 가입만 허는 거이 아니라 위원장놀이라도 요러타께 헐 수 있응께로."
이지숙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만에 하나까지의 위험도 경계하는 죽산댁의 태도에서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의 철저성과 그녀 나름대로 갖춘 삶의 슬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1쪽

지주들이 논두렁의 콩이나 밭고랑의 고추를 못 본 체하고 넘긴 작은 혜택은 결코 소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양이도 쥐를 막다른 길로 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건 소작인들의 숨통을 미리 틔워버리는 지주들의 교활한 지배방법이었다.-141쪽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되어 광적인 살인과 파괴를 거친 다음 잿더미로 끝난다.-159쪽

선임하사는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해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 드런놈, 외다리 게다짝 하나 붙였다고 나이도 새파란 새끼 좆같이 놀고 있네. 이 새끼야, 사람 무더기로 죽이자고 폭탄 저리 쏟아붓는 게 뭐가 그리 근사하고 재미난 구경거리냐. 네 놈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해봐, 참 근사하기도 하겠다. 그러고 말야, 저 폭탄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게 따지고보면 다 우리 동포야, 동포. 원 개새끼, 드러워서 못 참겠네. 그는 되는 대로 욕질을 해대고 있었다.-162쪽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삼 개월을 통해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치하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다시 이념의 격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며 부서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민중들이었다.-233쪽

국경선, 북쪽 땅의 끝 – 이학송은 압록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칠백 리를 흘러내리는 강, 단순히 물이 모아져서 흐르는 물길이 아니라 반도땅의 수만 년 세월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강, 이 강 앞에 이런 심정을 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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