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5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그건 글줄이나 읽었다는 자들이 저지르는 가당찮은 착각이고 자만이고 오해야. 인생살이 전체를 놓고 생각해볼 때 유무식의 차이란 글줄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가 아닐 것이네. 그건 인생살이의 진실이나 고통을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네. 농민들만큼 인생살이의 쓰라림과 아픔과 슬픔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나. 그리고, 세상의 잘못 짜여진 구조에 대해서, 그것이 배웠다는 자들이 꾸미는 집단횡포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 자들의 교활과 위선과 자만에 대해서 그들은 다 느끼고 판단하는 이지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은 그들이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바보나 천치들인 것으로 취급하려 들어. 그거야말로 큰코 다칠 일이지. 배웠다는 자들이 번드르르한 말로, 그럴싸한 이론이라는 것으로 발라맞추는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깨닫고, 몸으로 말하네. 소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말을 배웠다는 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야.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들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통하는 몸으로 하는 말을 해.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 주는 식을 한다는 ‘농촌계몽’이야.-26쪽

이거 참, 세상이 갈수록 쑥밭이오. 온통 사바사바에 빽이면 안 통하는 일이 없고, 미운 놈은빨갱이로 몰아치면 깨끗하게 제거되고, 이거 볼장 다 본 세상이오.-153쪽

그 사람도 군대생활 해나가기는 어려울 게요. 군부에서도 벌써 광복군 출신이나 학병 출신들은 한직이나 난직으로 밀리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그레샴의 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잖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183쪽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은 극형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삼십육 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만가를 따져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백오십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삼백만으로 줄여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의 꼴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써도 좌익으로 몰아 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나.-188쪽

당신은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으려 하고, 민기홍은 한사코 역사를 피하려 하고 있어. 그러나 당신 조심해, 국회의원도 빨갱이로 잡혀들어가고, 특위도 빨갱이 소굴로 몰아치는 세상이야. 기자라는 게 방패가 못돼, 구타도 당했잖아. 왜 당신을 보고 염상진 선배 생각이 날까, 염상진…… 염상진……-191쪽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손승호는 앞이 콱 막혀버린 것 같은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패로 갈라진 거대한 편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으깨져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목숨을 지탱하려면 그 것에 굴복해야 했고, 목숨을 포기하려면 그것에 대항해도 좋았다.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실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의 구차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196쪽

그분을 존경했거나 아끼고, 정치적으로 무슨 기댈 걸었던 사람들이라면 거의가 그런 비슷한 심정들 아니겠나. 어쨌든 이런 분단현실 속에서 그분의 죽음은 민족적 손실임이 틀림없지. 그러나 말야, 개인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극적인 죽음도 없을지 모르네. 민족이 필요로하는 상황에서, 그 어떤 오류도 저지르지 않고, 가능성만을 남겨놓은채, 정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분은 일제하의 투쟁경력과 더불어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것이네. 우남은 정적을 제거했다고 편안한 잠을 잘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적을 역사 속의 영웅으로 만드는 일을 거들었고,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은 역사 속의 죄인으로 만드는,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손해를 보는 어리석고 아둔한 짓을 저지른거야.-218쪽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조작에 있어서 우남이 백범보다 한 수 위라고 하고,백범은 정치가라기보다 혁명가라는 통설을 만들다시피했는데, 내가 보기엔 절대 그렇지 않네. 우남은 정치를 현실 자체로만 파악하는 단견의 소유자고, 백범은 정치가 현실이면서 곧 역사라고 파악하는 거시적 안목의 소유자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그 정책에도 현격한 차이가 나서, 우남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 단정수립이다, 친일반역자들과 야합이다, 특위 습격명령이다, 백범 피살이다, 하고 역사에서 비판 받을 짓만 계속 하는 거고, 백범은 그와 반대로 민족 전체의 삶을 전제로 외세배격이다, 민족통일이다, 친일파 척결이다, 남북협상이다, 분단획책의 단선 거부다, 하고 객관적 명분의 길을 걸은게 아니겠나.-219쪽

죽은 자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관대하고, 죽음을 계기로 생전의 모든 잘못을 해결지으려 하고, 죽은 자에 대한 비판을 죄악시하는 우리네의 소박하고도 단순한 인정주의적 윤리관과, 굿 좋아하고, 구경 좋아하고, 흥 좋아하는 우리네의 꾸밈없는 즉흥적 생활관을 굳이 끌어들여 그 많이 몰려든 사람들이 가진 조의의 순수도를 감점한다 하더라도 역시 백범은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인물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고 손승호는 생각했다.-234쪽

절대자유란 날아가는 새에게도 없는 법입니다. 새는 자연의 통제를 받아야 하니까요.-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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