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어쩌면 하늘이 저리도 맑고 푸르고 끝도 없이 깊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하늘의 깊이를 따라 눈길을 길게길게 뻗치고 있는 들몰댁의 가슴에는 까닭 모를 서러움이 차츰 차오르고 있었다. 서러움은 가슴을 채우고 목을 채우고, 입으로 넘쳐올랐다. 추수를 끝내서 더 넓어보이는 고읍들이 서러움으로 차고, 산들도 서러움 속에 잠기더니 마침내 하늘까지도 서러움으로 뒤덮였다. 그 하늘이 차츰 흐릿흐릿 변하고 있었다. 들몰댁은 무심결에 눈을 훔쳤다. 손등에 눈물이 묻어났다. 그때서야 들몰댁은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 가슴에서 일기 시작한 서러움이 하늘을 덮은 것이 아니고 하늘의 그 끝없이 푸른 색깔이 바로 서러움으로 자신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늘의 푸름이 그대로 서러움이었고, 서러움의 색깔이 바로 그 끝없는 하늘색이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고생길도 저리 끝이 없을 것이다.-11쪽

어머니는 이제 억지로라도 강해지고 억세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첫번째 표현이 바로 자신의 서울 유학을 계속하게 한 것이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앞으로의 생애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앞으로의 어머니 생애에는 여자로서의 삶은 없고 어머니로서의 삶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 삶인가.-67쪽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느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서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아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승무)-74-75쪽

어느 서양여자는 ‘단아하고 정갈하게 흰 수건을 머리에 쓴 말수가 적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서 ‘조선인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그러나 빨면 빨수록 희어지다 못해 하늘빛을 닮아가는 무명이라는 천은 천년에 걸쳐 이 땅에 이음하여 내려온 가난과 배고픔의 색깔인 것이고, 그 흰 천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여인네들이 정작 흰색을 경원해 마지않는다는 사실을 그 여자는 몰랐을 것이다. 한평생 흰 수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자기네의 신세를 여자들은 한스러워했고, 누구나 마음속에는 언젠가 그 지긋지긋한 흰 수건을 벗고 비단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동백기름 자르르 바르며 살게 되기를 한 가닥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십중팔구 시집올 때 한번 그리고 죽어서 다시 한번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 뿐이었다.-142-143쪽

이 세상 일이란 시작 없는 끝이 없는 법이고, 나무는 괜히 흔들리는 법이 아니지.-177쪽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ŸR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헐까?-252쪽

빼앗긴 자가 빼앗으려는 욕구나, 빼앗은 자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구가 본능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본능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빼앗긴 자의 본능이 생존권 선언이라면, 빼앗은 자의 본능은 재산권 옹호였다. 빼앗긴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공격적일 수밖에 없고, 빼앗은 자는 어쩔수 없이 방어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 대립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고, 그 피해자인 선우진 같은 사람들은 감정적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290쪽

손승호는 심재모에게 잔을 권했다. 그의 음성이 약간 격해진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술기가 감돌았다 심재모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도 사람들은, 이거 경솔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지 억센 것도 같고, 거친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주눅든 것 같고 경계하는 것 같고 그런 인상입니다.", "그렇게 보이던가요? 그렇다면 상당히 정확하게 보신 거군요. 그게다 대대로 이중적인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관찰이지요. 그 사람들 가슴에는 끝없는 회한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한이 맺혀 있는 거지요. 전라도나 경상도 땅은 옛날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이 깊게 서린 땅입니다. 동학란이 전라도에서 일어나고, 경상도로 번져간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겁니다. 욕으로 화풀이하며 견디고, 육자배기로 신세 한탄하며 견디고, 그러다가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어 폭발한 것이었지요."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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