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2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가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상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레 확인해야 했다.-20쪽

염상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단순해서 다루기 편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염상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26쪽

시상이 다 알대끼 좌익으로 몰아때리지 않더라고? 누가 좌익이 되고 잡아 좌익이 되간디? 옳은 소리 혀도 좌익, 바른 소리 혀도 좌익, 다 좌익으로 몰아쳐서 꼼지락달싹 못허게 맹그는 판잉께, 좌익질도 한분 똑바라지게 못혀보고 경찰이 맹근 대로 좌익죄 받느니 진짜배기 좌익질이나 한판 해뿔고 보다 허고 남정네덜 맘이 서로 통헌 것 아니겄능가.-44쪽

모든 인간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그것은 곧 지배의 욕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생리는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86쪽

강동식은 어금니를 물었다. 지금 우리가 수행할 일은 그런 사소한 개인 감정에 좌우되는 보복이 아니라 더욱 과감한 혁명투쟁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대장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이 상하고 있는 것이 어찌 소사한 일일 수 있는가. 우선 내 가족, 내 피붙이부터 잘살아보자고 혁명도 하는 것이고 고생도 하는 것이지 처자식 맞아죽어 없어지거나 골병들어 병신이 되어버리면 누구 좋자고 혁명이고 투쟁이고 할 것인가.-89쪽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삼분의 이가 다시 잡혀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94쪽

포고문에는, 형식적이고 입바른 인사치레 잘하는 그들답지 않게 조선의 해방을 축하한다거나 조선인이 되찾은 자유를 경하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인사말 한마디 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경직된 경고만을 나열해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군정의 은혜로운 조처에 의해서,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죄상으로 마땅히 처단되거나 단죄를 받아야 될 고등계형사나 순사.순사보, 밀정 노릇을 했던 부류들이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일제치하에서보다 한두계급씩이 더 승진된 상태로서였다. 일본인들이 차고앉았던 높은 자리를 채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형상이었다.-109쪽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 다수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십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177쪽

나는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2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