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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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건 뭔가 그리운 감촉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기 전에 혐오도 애정도 뒤죽박죽이 되어 공기에 섞여있는 장소의 냄새. 그러나 그 반면에 접근하기 어렵고 만지면 위험한 것이라는 점도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취기가 광기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보다 본능적인 자기 비하의 감정이었다. 분명히 자기보다 강대한 존재와 마주친 야생 동물이 느낄 법한 무조건적인 도주에 대한 욕구와도 같은 것. (신혼부부)-17쪽

"참혹한 것을 보고 죽는 사람도 있고, 네 어머니처럼 죽지 않는 사람도 있고, 다시 읽어서는 가족, 엉망이 되어버리는 가족 등 여러 경우가 있는데 사건의 성질에 따라 다른 건지 사람들의 성격 탓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아이는 핸디캡을 떠안게 되지. 나는 어머니의 비참한 주검을 보았어. 하지만 살아 있으면 핸디캡이 있어도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 적어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서 의사가 된 거야?", "글쎄.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죽음과 친하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 죽음에 대한 인상이 뚜렷이 각인되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냄새가 스며들었다. 사라지지 않는다. (도마뱀)-49-50쪽

옆집 아이가 연습하고 있는 서투르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 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다. 마음속에 비친 파란 하늘 가득히 마치 스며들기라도 할 듯이 음색이 흘러갔다. 서투르면 서투를수록, 어설프면 어설플수록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선명한 파랑과 어울렸다. (나선)-56쪽

둘의 생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 태고의 남녀야. 아담과 이브의 연정의 모델이지. 사랑하는 사이인 남녀 중의 모든 여자에게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여러가지 버릇이, 모든 남자에게는 응시의 순간이 있어. 상대방을 서로 따라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나선이지. DNA처럼, 이 대우주처럼. (나선)-67-68쪽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에 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압력이었다. 모두 같이 차를 마실 때는 각자 돈을 내고 혼자만 밥을 먹거나 하지 않는다. 가고 싶지 않더라도 사원들의 단체 여행에 가지 않으면 선배와의 관계가 거북해진다. 밤중의 택시는 전부 무조건 멀리 가는 손님을 원한다. 혼자 사는 여자가 세 군데나 옮겨가며 술을 마시러 가면 탐욕적으로 보인다. 미혼의 남자 사원과 점심을 먹으면 항상 함께 먹곤 하던 애들이 화를 낸다. 모든 것이 세분화되어 있는 만큼 좁은 지역 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수없이 많은 이상한 규칙들. 불륜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말하기 전에 우선 일반화해서 처리하려는 경향. (김치꿈)

-73쪽

같은 음식, 같은 냄새, 같은 방에 포함된 정보가 꾸게한 똑 같은 꿈. 제각기 다른 몸을 가지면서 공유할 수 있는 것, 생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김치꿈)-89쪽

그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마스코트를 만들 수 없게 되어도 나는 술장사든 뭐든 할 수 있고 가난도 두렵지 않다. 다만 두려운 것은 버드나무 가지가 햇볕을 쬐고 나서 다음 순간에 거센 바람에 흔들리듯이, 벚꽃이 피었다가 지듯이,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 석양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방에, 뒹굴며 비디오를 보고 있는 그의 등에, 그리고 이 공기에 이별을 고하며 밤이 찾아오는 것. 그것만이 가장 슬플 뿐이다. (피와 물)-113쪽

대단해, 전혀 다르게 보이다니. 나는 생각했다. 내 마음가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오카와바타 기담)-161쪽

이 창에서 아침에 보는 강의 수면, 마치 구깃구깃한 금박지가 몇만 장이나 흘러가는 것처럼 빛나고 있다. 그런 것과 비슷한 화사한 빛이었다. 어쩌면 옛날 사람은 이걸 희망이라고 불렀는지도 몰라,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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