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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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명 두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키친)-9쪽

어둠 속에서 비에 젖은 밤풍경이 번져 있는 커다란 유리창, 에 비치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세상에, 나와 핏줄이 닿는 인간은 없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모두 가능하다니 아주 호쾌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어, 라고 나는 생각한다.(키친)-16쪽

이 엄마가 죽은 후에, 에리코 씨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린 나를 안고, 뭘해서 먹고 살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대요. 더 이상 아무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아서.(키친)-22쪽

암울하고 쓸쓸한 이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가 빛나는 것이란 걸 안 때가 언제였을까. 사랑받으며 컸는데, 늘 외로웠다. - 언젠가는 모두가 산산이 흩어져 시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키친)-30쪽

할머니가 죽자, 이 집의 시간도 죽었다.(키친)-32쪽

어째 우리 주변은 죽음으로 가득하네. 우리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유이치를 낳은 어머니, 그런 데다 에리코 씨까지, 정말 굉장하군. 우주가 넓다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거, 우연치고는 굉장한 우연이지. ... 참 잘도 죽는다. (만월)-69쪽

나는 다 읽은 편지를 원래대로 살며시 접었다. 에리코씨의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가슴이 저렸다. 언젠가는 아무리 편지를 펼쳐도 이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가장 고통스럽다.(만월)-73쪽

사랑이란 그런것이다. 그것이 나한테 받은 특별한 것이라 해도, 그가 바르게 자라 다른 사람한테 받은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해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한 태도에 나는 상당히 호감을 품었다. 그리하여 방울은 마음을 통하게 했다. 만날 수 없는 여행 내내, 서로 방울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는 방울이 울릴 때마다 나와, 내가 있었던 여행 전의 나날을 알게 모르게 떠올렸고, 나는 먼 하늘 아래서 울리고 있을 방울과, 방울과 함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지냈다. (달빛 그림자)-144쪽

무엇보다 밤이면 잠들기가 무서웠다. 아니 눈뜰 때의 충격이 감당할 수 없었다. 퍼뜩 눈을 뜨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때의 깊은 어둠에 떨었다. 나는 항상 히토시와 연관된 꿈을 꾸었다. 숨막히고 옅은 잠 속에서 히토시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면서, 항상 이건 꿈이고 실제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 속에서도 눈을 뜨지 않으려고 애썼다. 몸을 뒤척이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토할 듯한 우울 속에서 멍하니 눈을 뜨는 추운 새벽이 몇 번이었던가. 커튼 너머가 밝아지고, 파르스름하게 숨쉬는 시간 속에 나는 방치된다. 이럴 거면 차라리 꿈속에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 외롭고 춥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홀로 꿈의 여운 때문에 허덕이는 새벽이다. 항상, 그 시간에 눈으 ㄹ뜬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지칠 대로 지치고, 아침의 첫 빛을 기다리는 길고도 광기처럼 고독한 시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나는 달리기로 마음 먹었다. (달빛 그림자)-146-147쪽

지금은 잘 안다. 그의 세일러 복은 나의 조깅이다.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만큼 유별난 인간이 아니라서 조깅으로 충분할 뿐이다. 그는 조깅 정도로는 전혀 효과가 없고 자신을 지탱하기에 부족하여 변주로 세일러복을 선택했다. 양쪽 다 시든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수단에 지난지 않는다. 기분을 다른 데로 돌려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달빛 그림?-157쪽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장소에서는 영구히 시간이 정지한다. (달빛 그림자)-162쪽

그는 말을 걸면 웃는 얼굴이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걸어가는 그에게 말을 걸기가 왠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몹시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똑바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억이 추억으로 보이는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 길은 멀고, 앞 길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외로웠따. (달빛 그림자)-174쪽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달빛 그림자)-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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