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가장 무섭다. 살아 있는 인간에 비하면, 장소는 아무리 소름 끼쳐도 장소에 지나지 않고, 아무리 무서워도 유령은 죽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무서운 발상을 하는 것은 늘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14-15쪽
나는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길은 어디와도 이어져 있지 않고, 이 여행은 끝이 없고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령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이런 시간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게 아닐까.-20-21쪽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시간은, 늘어났다 줄어든다. 늘어날 때는 마치 고무처럼, 그 팔 안에 사람을 영원히 가두어둔다. 그리 쉽사리 풀어주지 않는다. 아까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아도 1초도 움직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사람을 내버려두곤 한다.-26쪽
그 여자의 외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구나, 일부러 자기가 약을 많이 먹은 것이로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에게 조금 먹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의 인상이 허망한 것이다.-63쪽
마침 가로수의 가지가 보이고, 젊은이들이 즐거게 떠들어대며 헌옷 가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채소 가게가 있어, 온갖 색의 채소가 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예쁘게 보였다. 감의 색. 그리고 우엉과 홍당무의 색.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신이 만든 색이다.-110쪽
옛날에 읽은 어떤 책 속에, 길모퉁이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죽을 때에도 그 음악이 흐른다는 내용이 있었어. 주인공이 어느 화창한 오후에 길을 걷고 있는데, 건너편 레코드 가게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와서, 그는 앉아서 그 음악을 들어. 그의 정신적인 스승은, 인간 생활의 어떤 측면에든 죽음이 현재한다는 증거라고, 그의 운명이 그에게 보여준 증거라고 말하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트럼펫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지.-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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