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1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자신이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름만 가졌지 그건 좀처럼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저 ‘무당딸’이었을 뿐이다. "그래요, 우리 두 사람의 운명도 저 레일 같은 거요. 저 레일은 두줄로 뻗어갈 뿐이지 영원히 만나지도, 합해지지도 못하게 돼 있소. 정하섭이 손을 잡은 채 한참 만에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 황감하면서도, 마디마디가 돌멩이가 되어 가슴을 쳤다.
-23쪽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 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겄다." 남자애는 불쑥 말하고는 비파 껍질을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그 말에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바라 소리가 친친 얽혀 감기고 있는 대청을 향해 뛰었다.-26쪽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헌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 맺힌 한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혔지 풀리는 것이 아닝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 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꺼정 끊어묵는 법인디…-31쪽

어둠 속이어서 그런지 담배 끝에 매달린 불꽃의 색깔이 갓 피어난 아침꽃의 색깔처럼 싱싱하고 선명했다. 그는 무슨 예시나처럼 그 두 가지 색깔이 지니는 공통점을 문득 깨달았다. 그건 생명감이었다. 불꽃, 타오르는 불꽃이 지니는 생명감, 그는 서둘러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연기를 삼키지 않았고, 두 눈동자는 빠알갛게 타드는 담뱃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투명한 밝음과 싱싱한 색깔로 타는 불꽃에서 그는 염상진을 보고 있었다. 불꽃을 물고 타는 한 개비의 담배, 어쩌면 그건 바로 염상진인지도 모른다. 불꽃이 타오르는 정열로, 불꽃이 타오르는 생명력으로 자신이 신념하는 세계를 위해 타오르는 사나이. 그러나, 불꽃이 다 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건 회색빛 재일 뿐이다. 그것만큼 완전한 허무가 또 어디 있을까. 그것은 불꽃의 현란한 생명력 때문에 더 완전한 허무가 되는 것이다.-55쪽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방의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다.

-66쪽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 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다.-67쪽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야 했다. 학병에 끌려나가면서도, 버마의 정글 속에 동료의 무덤을 계속 파면서도, 후퇴하는 자동차를 쫓아오며 경상도 사투리로 부르짖다가 끝내 길바닥에 나둥그러지던 정신대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그렇게 기막히지는 않았었다.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받는 핍박보다 기대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이 열 배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였다.-79쪽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땅과 우리 민족입니다.-84-85쪽

정하섭은 글을 마치며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 걸 참아내느라고 잠시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어머니는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혁명의 열기가 정열마저도 어머니라는 이름은 눈물로 녹이려 든다.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자만이 갖는 것인데 정작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다. 어머니, 그 슬픔 이름의 항시 새로운 그리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103쪽

가을 햇살이 후원 가득 차고 있었다. 여름 햇살의 열기가 다 바랜 가을 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면 가을 햇살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내려앉는다. 노릇노릇 변색한 잔디 위에 가을 햇살은 골고루 내려앉는다. 후원에 가득한 온기가 노란 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아늑했다. 그런데 그 보드랍고 아늑한 온기 그 어딘가에 스산한 슬픔이 있다. 그게 조락을 주도하는 가을 햇살의 체취인지도 모른다.-105쪽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머신디.

-155쪽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허구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디ŸR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면 지주 다 쳐ŸR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156쪽

세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세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사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면들의 존엄성보다 세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 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떤 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에 있어. 영국인들으 자기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 비유에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세익스피어를 세계화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세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으로 비유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세익스피어는 후대를 잘못 둔 셈이지.-233쪽

정치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241쪽

들몰댁은 엉겁결에 어머니를 부르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들몰을 보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울컥 솟았던 것이다. 언제나 홍태거리에만 다다르면 어디에선지 어머니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상스럽게도 그 냄새는 언제나 싱싱했고 언제나 슬픔이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냄새는 진한 그리움이었다. 가난을 이기고 살아온 어머니의 고생을,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기르며 겪었을 어머니의 마음 아픔을 깨달아가면서 그 그리움은 진해져가는 것이었다.-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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