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동화집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서웅 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장바구니담기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수많은 노래를, 그러니까 풀과 꽃과 인간과 구름, 활엽수와 침엽수, 모든 동물, 먼 바다와 산, 그리고 별과 달에 대한 모든 노래를 동시에 이해하고 노래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신이 되고, 새로운 노래 하나 하나는 별이 되어 하늘에서 빛날 것이라고. (피리의 꿈)-87쪽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음조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이 혼란에 빠진 채 가슴이 답답해져 침묵했다. 이 기품 있고 현명한 늙은 가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한 것이 맞다면, 나의 노래는 전부 어리석은 것이며 단순한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세상은 근본적으로 신의 마음처럼 선하고 밝은 것이 아니라 어둡고 괴롭고 사악하고 음울한 것이었다. 숲이 살랑거리는 것도 즐거워서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피리의 꿈)-89쪽

아우쿠스투스는 눈을 감고 어두운 복도에서 자신을 이끌어준 저 멀리 불빛을 바라보듯, 그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한때 그의 주변이 얼마나 낡고 아름다웠는지, 그러고서는 천천히 어두워져서, 이제는 자신이 암흑 속에 서서 아무것에도 기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곰곰 생각하고 기억해 낼수록, 저 쪽 멀리 있는 작은 불빛은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그리운 것으로 보였다. 마침내 그는 그 불빛을 알아보았고, 눈에는 눈물이 흘러 넘쳤다. (아우구스투스)-116쪽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불행이 있는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얼마나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는 매일같니 놀랐다. 모든 고통 곁에는 기쁜 웃음이 있고,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 곁에는 아이의 노래가 있으며, 모든 곤궁과 비천함 곁에는 점잖음과 위트와 위로와 미소가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언제나 멋지고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우구스투스)-121쪽

전쟁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야. 그건 폭풍이나 번개처럼 스스로 오는 것이고, 그것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우리 모두는 전재으이 선동자가 아니라 그 희생자일 뿐이다. (다른 별에서 온 놀라운 소식)-162쪽

산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해와 별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자신과 같았던 것은 바람과 눈, 물과 얼음이어싿. 자신과 같았던 것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시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었다. (팔둠)-194쪽

모든 것에서 사람들이 싫증을 낼 정도로 오랫동안 포식한 것들의 냄새와 맛이 났다. 오, 다정하고 기분 좋은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기력과 정신을 달아나게 하며, 향기를 변하게 하고 색깔에 조용히 독을 넣은 이 안내인의 끔찍한 짓을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증오하였는지! 아, 어제까지 포도주였던 것이 오늘은 식초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리고 식초는 결코 다시는 포도주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험한 길)-200-201쪽

붉은 등잔 불빛이 큰 방 안으로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바깥의 나무들이 바람 속에서 신음했다. 순간 나는 밖에 있는 밤을 가장 깊이 있게 보고 느꼈다고 믿었다. 땀과 습기, 가을, 씁쓸한 나뭇잎 냄새, 바ㅏㄻ에 날려가는 느릅나무 잎새, 가을, 가을이여! (꿈길)-218쪽

그에게 말을 걸었고 친밀하게 다가왔다. 그는 숲과 강, 강고 ㅏ자신, 하늘과 땅과 식물 사이의 가장 내밀한 관계를 느꼈다. 모든 것이 이 시간에 그렇게 하나가 되어 그의 눈과 가슴속에서 반사되기 위해, 만나고 인사하기 위해 유일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화가)-246쪽

행복은 다시 먼 미래에 놓여 있었고, 거기로 가는 길은 무덥고 먼지투성이에다 평범해 보였다. (아이리스)-265쪽

"사랑하는 아이리스, 이 세상이 좀 달라졌으면! 꽃과 사색솨 음악으로 가득 찬 아름답고 온화한 세게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평생 당신 곁에서 당신 이야기를 듣고 당신 생각 속에서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을 텐데. 당신 이름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아요. <아이리스>는 정말 놀라운 이름이지. 그게 뭘 생각나게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오." (아이리스)-267쪽

관계와 보완이라는 은밀한 법칙 말예요. 자연은 그런 법칙으로 가득 차 있어요. 비겁한 민족은 용기를 찬미하는 민요를 가지고 있지요. 사랑을 모르는 민족이 사랑을 찬미하는 희곡을 가지는 것이고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난로들도요. (난로와의 대화)-283쪽

"참 많이도 물어대시는군!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온 자연 가운데 떡갈나무는 하나의 떡갈나무일 뿐이고, 바람은 바람, 불은 불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만은 모든 것이 다르지요. 모든 게 의미심장하고, 모든게 암시적이라니까요! 인간에게는 모든 게 신성하고, 모든 게 상징이 됩니다. 살인이 영웅적인 행위이고, 전염병은 신의 손가락이며, 전쟁은 진화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난로가 그저 난로일 수 있겠습니까?" (난로와의 대화)-284쪽

그러나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마술사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내게는 다만 어른들의 어리석은 타협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나, 아주 깊고도 내적인 불만의 표출이었다. (마술사의 어린 시절)-295쪽

마술에 대한 소원은 시간이 감에 따라 그 목표를 바꾸어 갔다. 바깥 세계로부터 점차 나 자신 안으로 끌어들였다. 사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애썼고, 마버브이 외투를 입고 투명인간이 되려는 유치한 기술 대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살아 있는 현자가 되려는 소망으로 바꾸려 했다. (마술사의 어린 시절)-296쪽

행복한 사람이야말로 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숨은 현자로 생각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똑똑한 것보다 더 바보 같고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술사의 어린 시절)-309쪽

도대체 아이들이 어른보다 덜 옳고, 덜 착하고, 덜 중요했단 말인가? 오, 그렇지 않다. 그 반대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힘이 세고 명령하고 지배하는 존재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 아이들과 아주 똑같은 놀이를 했다. 소방대 놀이를 했고, 병정 놀이를 했으며, 모임에 나가고 음식점에 갔다. 이 모든 일은 매우 중요하고 정당하다는 인정을 받으며, 마치 이 모든 것이 그래야 하고, 그 보다 더 아름답고 거룩한 일은 없는 것처럼 행해졌다. (마술사의 어린 시절)-311쪽

그러나 얼마전까지 자기도 아이였던 이 <위대한> 사람들 중에서도, 아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고, 일하고, 놀고, 생각하고, 무엇이 그에게 사랑스럽고 무엇이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술사의 어린 시절)-312쪽

<오 복되도다, 오 복되도다,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것이!> 이것은 하나의 비밀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만 있고 어른들에게는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키가 크고 힘이 셀 뿐,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불쌍했다! 큰 체격과 위엄, 겉으로 보이는 자유와 자립, 수염과 긴 바지 때문에 우리가 부러워하는 어른들이, 때때로 우리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을 노래하면서까지! (마술사의 어린 시절)-313쪽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일과 비교되는 일이라면 - 바로 그 배반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은 필요불가결하고, 오랜 옛날부터 정해지고 예언된 일이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과 세상을 향해 물었다. 만일 유다가 도덕과 이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역할을 회피해 배반하기를 거절했더라면, 신의 의지와 속죄는 최소한 변하거나 방해받지 않았을까? (새)-35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