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구판절판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9쪽

그 날은 그 해의 가장 무더웠던 날들 중의 하루로서 뜨거운 열기가 납덩이처럼 묘지를 내리누르고 있었고 썩은 참외와 불에 탄 쇠뿔이 섞인 듯한 부패 가스가 근처의 거리를 꽉 채우고 잇었다. 그르누이의 어머니에게 진통이 찾아온 것은 페르 거리의 생선 좌판 뒤에 선채로 좀 전에 꺼낸 대구의 비늘을 손질 할 때였다.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그전에도 전부 이곳 생선 좌판 뒤에서 일을 끝냈었다. 아기들은 전부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 태어난 핏덩어리들은 주변에 널려있던 생선 내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고, 게다가 생명이 그다지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녁 무렵엥는 다같이 쓰레받기에 담겨 치워졌다. 그리고는 수레에 실려 묘지나 아래쪽 강가에 버려졌다. 오늘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뻔했다.-11쪽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한시바삐 모든 일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진통이 찾아오자 커다란 도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앞서 네 번의 경우처럼 생선칼로 핏덩이의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백합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수선화가 갇그한 좁은 방에 있을 때처럼--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참을 수 없이 자신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옆으로 쓰러지더니 길 한가운데 쌓여 있는 생선 더미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누워 있는 그녀의 손에 여전히 칼이 들려 있었다.-12쪽

그는 날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적개심과 반항심을 억누르고 진드기처럼 다가온 추운 겨울을 살아 남기 위해 애썼다.끈질기게 참고 눈에 띄지 않도록 애쓰면서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의 불꽃을-비록 작지만 꺼뜨리지 않고-잘 간직하였다-47쪽

그를 가장 자유롭게 만든 것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이었다. 파리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60만 내지 7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거리에도 시장에도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지하실에서 지붕 꼭대기까지 건물마다 사람들로 차지 않은 곳이 없었다. 파리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단 한곳도 없었으며, 인간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돌멩이 한 개, 흙 한줌 찾을 길이 없었다-156쪽

그러나 옷에 그의 냄새는 없었따. 그 위 체취가 옷에 배어 있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돌, 모래, 이끼, 송진, 까마귀의 피 냄새, 심지어 수년 전 그가 쉴리 근방에서 샀던 소시지 냄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옷은 지난 7,8년간의 모든 냄새가 기록된 일기장 같았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그 세월 동안 언제나 그걸 걸치고 있던 사람, 그 자신의 냄새만 거기에 없었다-209쪽

향수병을 잡고 있는 손에서 아주 부드러운 향내가 퍼졌다. ... 이 향수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향수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단지 그 효과에 굴복할 뿐이니까..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을 매혹시키는 것이 향수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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