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절판


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17쪽

나는 베아에게 지벤뷔르겐의 산들에 대해 얘기한다. 거기도 카르파티아 산맥에 속해, 나는 말한다. 우리 고향의 산들은 둥글고 깊은 호수를 품고 있다는 게 다르지만, 그 호수를 바다의 눈이라고들 해. 얼마나 깊은지 그 바닥이 흑해와 닿을 거라나. 호수를 내려다보면 발로는 산봉우리를 밟고 있는데 눈으로는 바다를 굽어보는 기분이지. 우리 할아버지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아래에서 흑해를 팔로 안고 있다고 말씀하셔.-73쪽

펜야의 공정함은 나를 철저히 노예로 만들었다. 비뚤어진 입과 저울 위의 정확성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펜야에게 느끼는 혐오감은 그 완벽함 때문이었다. 펜야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123쪽

빵을 바꾸기 직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둥대는 순간이 온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빵이 내 손을 떠나자마자 남의 손에 있는 빵이 더 커 보인다. 내가 받은 빵은 내 손에서 줄어든다. 상대는 나보다 눈썰미가 있다. 그가 이득을 보았다. 다시 바꿔야한다. 하지만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도 내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빵을 다시 바꾸는 중이다. 빵은 내 손에서 또다시 줄어든다. 나는 세번째 상대를 찾아 바꾼다. 먹기 시작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 배고픔을 좀더 견딜 수 있으면 네 번, 다섯 번까지 바꾼다. 그래봤자 소용이 없으면 이전의 빵으로 되바꾼다. 그러면 나는 처음 받은 내 빵을 손에 넣게 된다.-134쪽

나는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보다 빨리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시각적인 기억이 많을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두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다가 무심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죽은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어떻게 그리 민첩하게 행동 할 수 있겠는가. 죽은 사람을 보면 팔다리가 굳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기 전에 서둘러 옷을 벗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아껴둔 빵을 베게에서 꺼내야한다. 그렇게 말끈히 정리하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다.-168쪽

사람은 울지 않으면 괴물이 돌 수도 있다. 내가 이미 괴물이 된게 아니라면 나를 그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대단한 무엇이 아니다. 기껏 이 문장 정도이다. 너는 돌아올 거야.-214쪽

육십 년 후 꿈을 꾼다. 두 번, 세 번, 때로는 일곱 번까지 강제추방을 당한다.-265쪽

나는 이미 몇 달째 발로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집에.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야기에는 신빙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 때문에 남모르는 상처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분명 뭔가 물어봤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 년전에 돌아가셨다. 평화가 찾아온 지 삼 년째 여름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고, 나와는 다른 식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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