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장 푸른 눈
토니 모리슨 지음, 신진범 옮김 / 들녘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라는 작품을 읽어봤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어 좋아하게 된 작가예요. 그런데다가 ‘가장 푸른 눈’은 제목부터 제 마음을 잡아 끌더군요. 아마도 제가 푸른색을 좋아해서인가 봅니다.
푸른 눈 하면 아무래도 하얀 피부에 금발 머리의 백인 미녀를 떠오르게 되면서 사람 눈처럼 보이지 않는 푸른 눈은 무척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은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리라 봅니다.
이 책은 클라우디아의 시점과 각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래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들여다 볼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두에게 가지고 있는 큰 고통은 바로 인종차별이 아닌가 싶습니다.
클라우디아가 가지고 있는 셜리 탬플에 대한 증오는 특정 인물에 대한 증오가 아닌 바로 백인에 대한 증오였습니다. 흰 피부에 금발머리, 푸른 눈이 미의 으뜸인양 생각하는 사람들…
솔직히 저 역시 백인 아이들의 크고 푸른 눈을 보면서 인형 같아 이쁘다고 감탄한 적이 있었지만, 흑인 아이들을 보고는 그런 감탄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새삼 떠 오르네요. 아직도 흑인보다는 백인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과연 이 미의 기준은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되더군요.
자신이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피콜라는 길가의 잡초인 민들레가 너무나도 이쁘다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은 그 민들레를 꽃으로 보지 않고 한낱 잡초라 생각하고 무참히 뽑아버립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 미의 편견에 대한 무척이나 신랄한 비유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느꼈던 아픔을 아직 어린 흑인 소녀가 깨달아 버리는 순간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자신이 이쁘다면 자신의 가족이 행복할거라 생각한 피콜라는 푸른 눈을 가지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피콜라의 이쁜 마음씨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시달리고 집에서도 조차 사랑 받지 못합니다. 아니 아버지는 피콜라에 대한 연민을 비틀린 방식으로 풀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얽혀버리게 되지요. 아버지에게 겁탈당하는 순간이 무척이나 무미 건조하게 전개되는데, 그점이 더 섬뜻하기도 하고, 비참한 심정이 들더군요.
피콜라를 보면서 클라우디아는 피콜라만큼 자신은 불행하지 않으니 안도하고, 제 2의 피콜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설계합니다. 그 점은 비단 클라우디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피콜라가 함께 했던 마을의 모든 흑인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피콜라가 마을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셈이었지요.
물론 죄악의 씨앗이라고 할지언정, 피콜라가 가지게 된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증오를 보면서 과연 그것이 옳은 행동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길 바라는 아이를 피콜라의 친구인 클라우디아만이 무사히 태어나 주길 바라는 심정이 과연 어린 아이의 무지로 치부해야할까요? 왠지 백인에 대한 모든 증오를 피콜라에게 모두 쏘아 붇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미쳐버리고 나서야 푸른 눈을 가지게 된 피콜라를 보면서 그녀가 이제는 행복할거라는 위로를 받아야할지 울고 싶어지더군요. 처음 제목에서의 행복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제는 ‘푸른 눈’을 하면 피콜라가 생각나 슬퍼질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첫페이지가 무척 생뚱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점점 띄어쓰기가 맞지 않으면서 반복되는 문장속에 무엇을 말하고 싶은것일까? 궁금도 했고요. 나중에 알고나니 그 부분은 미국 어린이들의 읽기 교재에 인용된 구절이라고 하네요.
백인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점점 뒤틀려져가는 문맥을 보면서 피콜라의 피폐해져가는 정신 상태를 표현한 또 다른 방식 같았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점점 토니 모리슨이 좋아지려 하네요. 인종차별과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그속에는 또 소외받고 연약한 흑인 여성이 있습니다. 흑인으로 태어나것도 힘들지만, 흑인 여자로써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