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구) 문지 스펙트럼 6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절판


한때 난 까오미(高密) 동북 마을을 열렬하게 사랑하기도 했고 그곳에 대해 극단적인 원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장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공부하고 난 뒤에 결국 나는 깨달았다. 까오미 동북 마을은 분명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가장 누추하고, 가장 초연하면서 가장 속되고, 가장 성결하면서 가장 추잡하며, 영웅호걸도 제일 많지만 잡놈도 제일 많고, 술도 제일 잘 마시고 사랑도 제일 잘할 줄 아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 땅에서 살았던 나의 부모 형제와 친지들은 수수를 즐겨 먹었고 해마다 대량으로 수수를 심었다. 8월 만추가 되면 끝도 없이 펼쳐진 수수의 붉은빛이 광활하게 일렁이는 피바다를 이루곤 했다. 수수로 덮인 까오미 마을은 찬란하게 빛났다. 수수의 슬픔은 처연했고 수수의 사랑은 격렬했다. 가을 바람이 처량하게 불고 태양빛이 왕성하게 내리쪼일 때면, 기와빛 푸른 하늘 위로 새하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녔고, 붉게 물든 뭉게구름의 그림자가 수수 위로 미끄러지듯이 흐르곤 했다. 그때 검붉게 그을은 사람들은 몇십 년을 하루같이 줄을 지어 수숫대 속을 들락날락거리며 그물을 당겼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아낌없이 그들의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며, 일막 일막의 영웅적인 장극을 연출함으로써 이렇게 살아 있는 불초한 자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세상은 진보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種)은 퇴화한다는 것을 난 절실하게 느낀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