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절판


녹음이 한창이다. 이르게 핀 버들잎이야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늦게 핀 보리수 잎까지도 한창 무르녹았다. 잎이 어떻게 많이 우거졌는지 어느 가지는 척척 져서 늘어졌다.
달은 그 잎사귀 사이로 틈만 있으면 비친다. 그리하여 그림자가 얼룩얼룩하게 무늬를 이뤘다. 그리고 이따금 바람이 지날 때마다 그 무늬는 여러 가지로 모양이 변하고 모양이 변할 때마다 보기가 좋다.
쳐다보면 잎사귀 사이마다 달이 있다. 천만 잎사귀요 천만 달이다. 이때는 잎사귀와 달만 보인다. 보고 볼수록 잎사귀도 안 보이고 달만 보인다.
달이 나에게 보이나? 내가 달에게 보이나? 내가 저 달을 천만으로 볼 적에 저 달도 나를 천만으로 보나? 이윽고 머리를 숙였다 쳐들었다 하다가 보리수 아래를 떠나 그 위 언덕으로 옮겨서 보니 달과 나의 그림자와 셋일 뿐이다.-.쪽

"너 보기 좋냐."
"그럼 좋지 않구."
누이동생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도리어 내 씁쓸한 표정을 의아해하는 것이다. 그럼 누이가 감정을 과장하는 것인가, 내가 살구꽃을 살구꽃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감성이 소박하지 못함인가. 혹은 많이 얻으려거든 많이 기대치 말라는 말이 옳아 나는 너무 기대함이 컸던 까닭으로 이렇고 누이는 그것이 적었던 까닭으로 저런가 싶기도 하고, 나는 분명히 그 흑백을 가리기 위하여 어머니를 불러내어 그 꽃을 보시게 했다. 그러나 꽃을 쳐다보는 여인의 마음이나 얼굴은 같은 것인가 싶어 누이동생과 똑같은 표정으로,
"그 꽃 좋다."
하지만 나 홀로 그 꽃이 좋은 줄을 모르겠으니 병은 내게 있음이 분명하고, 동시에 꽃에서 느낀 그것으로 말미암아 봉오리에게 가졌던 기대조차 잃고 말아 봄 전체에 대한 흥미를 잃은 듯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때 전일前日 이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는 날 나를 찾아 주기를 기약하고 간 벗이 방문해 주었으면, 그러면 이 살구꽃을 보는 마음이 동감同感이라면 적이 위안이 되련만. 그러나 내 집 꼴이 마당 가운데 늙은 살구나무만이 돋보이지 않을 만큼 윤택되지 못할진대 벗은 덮어놓고 좋다고 감탄해 줄 것이니, 그것도 믿을 수 없다.-.쪽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어여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비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만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님 그리워 잠 못 들어하는 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승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을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적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나도향쪽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는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읽어 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 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쪽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려 가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이러는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 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 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 보고 구백구십구 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구백구십구 권을 돌려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 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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