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의 심리학 -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샌디 호치키스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06년 10월
장바구니담기


많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세상에 내보이는 페르소나(persona, 외적 인격)는 종종 다른 이들에게 '우월감'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 오만한 가면 뒤에는 터지기 쉬운 자존감의 풍선이 숨어 있다. 그 자존감은 '잘했다' 혹은 '아주 잘했다'라는 기준으로 충족될 수 없으며, 반드시 '누구보다 낫다'라고 해야만 비로소 충족된다. 남보다 낫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치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절대적 가치란 없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누군가가 상승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은 그만큼 떨어진 셈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 입지가 위축된다고 느낄 때 누군가를 그만큼 축소하고 깎아내리고 떨어뜨려서 다시 우쭐한 기분을 되찾는다. 바로 이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들은 종종 대장 행세를 하고, 타인을 심판하려 들며, 완벽주의를 내세우고, 권력에 집착하게 된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결함과 수치심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고압적 위치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만약 그 자존감의 풍선이 인생사의 풍파를 못 견디고 터져버린다면 그들은 즉각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기보다 못한 점들을 들추며 수리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때때로 이 작업은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진다.-.쪽

인간의 온갖 감정들 중에서도 수치심은 연령과 지위를 초월하여 가장 참기 어려운 감정이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달리, 잘못한 소행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인격적 결함(pervasive personal flaw)이라는 고통과 관련된 문제다. 우리는 맨 먼저 엄마, 혹은 그에 버금가는 강한 애착으로 맺어진 존재의 눈에서 수치심을 경험한다. 아이는 돌 무렵에 엄마에게 흥분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와 그 기쁨을 나누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리면서 "안 돼!"라고 꾸짖는다. 예기치 못했던 엄마의 비난은 자신이 힘 있고 중요한 존재라는 아이의 착각을 단숨에 깨뜨린다. 그런데 바로 그 착각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생애 초기에 엄마와의 결합에서 이끌어낸,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우리는 아무 경고도 받지 못한 채 한순간에 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나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나쁜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경험을 사회화 과정을 통해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때로는 그 반복적 경험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을 회피하는 것으로 평생을 다 보낸다. 최근 신경생물학계의 연구는, 아동의 사회화가 시작될 무렵의 뇌는 강렬한 수치심을 느끼는 경험을 처리할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정서적으로 안정된 부모가 옆에서 따뜻하게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극도로 불쾌한 감정들을 조절하는 경로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며, 그 여파는 평생을 간다. 아이의 뇌가 적절하게 발달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부모가 어린아이들의 뇌가 아직까지 감당할 수 없는 것, 즉 그들에게 타격을 준 치명적인 수치심을 달래주고 완화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쪽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가 나르시시스트일 경우, '공생' 과정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정상적인 방식의 유대 관계가 맺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 어머니는 자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아이와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극히 자기애적인 이유로 모성적 역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녀를 매혹하는 것은 양육자로서 자신의 이상화된 모습이고 또는 아기를 갖고, 낳고, 젖을 빨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완성'하려는 욕망이다. 자신을 원형적 여성상으로 그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위대함에 바람을 넣고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기분을 한껏 부풀린다. 심지어 임신하기 전부터 그녀는 상상 속의 아이를 자신의 연장, 자기를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주고 타인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물론, 자기애적 어머니는 생명을 주는 자, 양육자로서 '자신이 지닌' 완벽함을 그대로 반영할 만큼 '완벽한' 아이를 원한다. 실제 태어난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이 기대를 저버린다면-자기가 바라던 성별이 아니었다든지, 못생겼다든지, 어떤 장애가 있다든지-그 어머니는 자기 자신에게 하자가 있다고 느끼고 수치와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다른 이미지, 자신에게 우쭐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좀 더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어머니는 자신의 추한 감정을 숨기고 타인들의 감탄을 상상 속에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자기 아이가 '완벽'하다고 느끼든, 내심 실망감을 맛보든 자기애적 어머니는 실제 아이보다 자기가 꿈꾸는 환상 속의 아이와 더 강한 유대 관계를 맺는다.-.쪽

나르시시스트에게 수치심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아예 그 감정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수단을 개발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피된 수치'라고 일컫는데 마치 창피를 모르는 뻔뻔함이나 양심의 부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배후에 부인, 냉담, 비난 혹은 분노를 차단하기 위한 벽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처리할 수 있는 건강한 내적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수치심을 바깥쪽으로, 즉 자기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영역으로 추방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절대로 '내 잘못'이 없다.-.쪽

오늘날 우리는 '자기' 또는 '자아'라는 개념과 애증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자아 개념은 이기심, 자기 중심주의, 자기 과대평가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속성들과 결부된다. 다른 한편 '자기-없음'(사심이 없음)이라는 것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지나치게 전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의존적이라느니, 자기 앞가림을 먼저 해야 하느니 이야기한다. 순교는 철 지난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라는 단어에 '인식'이니 '존중'이니 하는 말들이 덧붙으면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가 된다.
자아는 좋은가, 나쁜가? 자기에 전혀 투자하지 않고서 인간이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생존하는 것은 별개로 치고-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쏟지 않으면 우리는 계발되지도 자각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가치 또한 형성될 수 없다. 자아 없는 세상에는 독창성도, 색깔도, 대비도 없다. 그런 세상에는 다양성도 존재할 수 없거니와 선택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너'에게 홀딱 반할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쪽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에너지 투자인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이미 유아기와 유년기 초반에 그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생산적이며 만족스러운 성인기에 그 꽃을 활짝 피운다. 자신에 대해, 자기의 불완전함에 대해 웃어 넘길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다. 그런 나르시시즘은 긍정적 성격 특성이며,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고 타인의 삶을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질이며, 진실과 환상을 분리하되 여전히 꿈을 간직할 수 있는 지혜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 의심 없이 올곧게 성취를 추구하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진정한 자존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르시시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진정한 자존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쪽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다고 보는 나르시시스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를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화된 가치 체계에 따라-순전히 자기 관심사만을 따른다는 점은 별개로 치더라도-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며, 현실적 성취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자기 자신에게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피할 수 없는 자기 단점에 직면했을 때 겸손한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수치심만을 느끼며 대개 그 수치심을 교묘하게 잘 위장한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